천수만/주변 볼거리

홍성군 문화 유적지

천수만이무기 2009. 5. 3. 15:20

홍성군 - 문화 유적지


01 고산사   

02 용봉사

03 정암사

04 석련사   

05 구절암

06 산혜암    

07 광경사지   

08 홍주성   

09 신금성

10 송암리 산성      

11 사시라 성  

12 임존성   

13 해풍현성

14 주류성 (장곡 산성)   

15 결성읍성  

16 한용운 선생 생가지  

17 김좌진 장군 생가지

18 엄  찬 고택

19 조응식 가옥 

20 김우열 가옥 

21 전용일 가옥   

22 홍성고등학교 강당  

23 상하리 미륵불   

24 용봉산 마애불  

25 신경리 마애석불

26 대교리 석불입상

27 홍주 의사총 (구백의 총)  

28 결성향교   

29 홍주향교  

30 대원군 척화비

31 홍가신 청란비

32 복한 선생 효자비  

33 결성 동헌  

34 전운상 영정   

35 성삼문 선생 (탄생지)유허지  

36 임득의 장군 묘  

37 김복한 묘

38 이광윤 묘  

39 홍성 지석묘   

40 용대기  

41 양곡사

42 원홍주 육군상무사 유품(4)

43 연산 서씨 석보

44 최영 장군 사당

45 동문동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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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고산사   홍성군 결성면 무량리 492 

( 자료 - 1 )

고산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전하지만 건물의 위치와 앞마당에 있는 석탑들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절로 짐작 된다. 고산사 대웅전은 석가모니 불상을 모신 절의 중심 법당을 가리키는데 이 건물은 <대광보전>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지붕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가 주심포 양식의 초기 수법을 띠고 있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자 모양의 우물천장과 천장과 서까래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을 혼합하여 꾸몄다. 불단 위에는 불상이 앉은 자리를 장식하기 위해 지붕 모형의 닫집을 정교하게 만들어 놓아 법당 안의 엄숙함을 더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팔작지붕에 주심포 양식을 가진 아담한 건물로 그 구성방법이 독특하다.

( 자료 - 2 )

청룡산(235)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의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네모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중간에 기둥이 없는 것이 특색으로, 대광보전 중앙과 우측에 있는 불상은 토불이고, 우측의 석불은 입상이며, 좌대석은 팔각과 사각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큰 막돌 두벌대로 쌓고 덤벙 주초로 초석을 삼았으며,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쓰고 주심포식 공포를 짜 올렸다. 또한 절 안에 고산사 중수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창건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에 청룡산에 고산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 초기에 이미 이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74년 조사과정에서 암막새에 '천계6년6월(天啓六年六月)'이라는 기록이 있어 대웅전은 임진왜란 이후인 1626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측된다. 전후 간격이 좁은 대지에 대웅전을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요사를 하나씩 두고 있다. 대웅전 앞은 넓게 확보하지 못했다. 대웅전 기단에 붙여 삼층석탑을 옹색하게 세우고 측면에 위치한 요사와의 사이에는 조금 여유 있는 마당이 형성된다. 산지의 대지조건에 맞춘 자유스런 배치형태를 보이고 있다. 대웅전 앞쪽 한단 아래 작은 못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무고주 7량집에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대웅전 규모로서는 다른 건물에 비해 작은 편이다. 기단은 큰 막돌 두벌대로 쌓고 덤벙주초로 초석을 삼았다. 배흘림이 있는 원주를 쓰고 주심포식 공포를 짜 올렸다. 공포는 평방 위에 헛첨차가 있는 포작을 올린 다음 다시 뜬창방을 놓아두었다. 대들보 위에 포기 둥을 세우고 외부로 우미량을 끼웠다. 고려 말 조선 초 목조건축에서 흔히 보이는 건축기법을 쓰고 있으며, 내부 불상 위에는 화려한 닷집이 짜여져 있고,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이 대웅전은 조선 중기에 개축된 것이지만 건축구조와 양식으로 볼 때 고려 말기적 건축기법이 부분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엿 볼 수 있다.

( 자료 - 3 )

고산사는 청룡산(235)에 위치해 있다. 신라의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청룡산에 고산사가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초기에는 실재했음을 알 수 있다. 1974년 조사 과정에서 암막새에 '천계 6년 6월' 이라는 기록이 있어 대웅전은 임진왜란 이후인 1626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측된다. 앞뒤 간격이 좁은 대지에 대웅전이 있는데, 그 좌우에 요사채를 두고 있다. 대웅전(보물 제399호)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네모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간에 기둥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대광보전 중앙과 우측에 있는 불상은 토불 이고, 우측의 석불은 입상이며, 좌대석은 팔각과 사각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큰 막돌 두 벌대로 쌓고 덤벙 주초로 초석을 삼았다.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쓰고 주심포식 공포를 짜 올렸다. 절 안에 고산사 중수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고산사 대광 보전   (보물 제 399 호 1963.09.02)

( 가는 길 )

서해안 고속도로 홍성 나들목->29번국도->구항면->구항초등학교->결성(7km)->무량리(고산사 대웅전) 3km


02 용봉사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산 81

( 자료 - 1 )

용봉사에 대한 연혁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전하는 유물로 보아 백제 말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까지는 수덕사에 버금가는 큰 절이었으나 1906년 풍양조(趙)씨 가문에서 절을 부수고 절터에 공조참판을 지낸 조희순의 묘를 썼다. 이 때 마을 주민들이 현재의 위치로 절을 옮겼다. 1980년에 법당을 중수하고, 1982년 대웅전을 새로 지었으며 1998년에 산신각과 극락전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극락전·산신각·적묵당·일주문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조선 숙종 15년(1689)에 제작된 아미타삼존불과 후불탱화 등 5점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유물로는 마애불 2위와 괘불·부도·석조 등이 전하는데, 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이 많아 대찰의 면모를 보여 준다. 보물로는 홍성 신경리 마애석불과 용봉사 영산회괘불탱이 있다.

( 자료 - 2 )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용봉산의 북쪽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용봉사는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고찰이다. 용과 봉황이 있는 산에 있는 사찰, 용봉산의 용봉사라는 그 이름조차 범상치 않다. 이 절은 확실한 청건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으나 각종 유물에 의해 백제 말 혹은 통일신라시대까지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찰은 용봉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절의 이곳저곳에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2개가 있는데, 고려 초로 추정되는 마애불과 조선후기 1690년에 조성된 영산회괘불탱으로서 이들 성보에 의해 사찰의 격이 높아 보인다. 더욱이 이 사찰의 창건시기를 백제시대로 소급해도 좋을 것으로 여겨지는 석조가 있는데 이것은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사찰의 앞쪽에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마애불이 위치해 있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사찰 경내에 부도 또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이처럼 용봉사에는 홍성 지역의 사찰 중에서 불화, 불상, 부도, 석조공예품 등 종류가 다양하고 내용이 풍부한 성보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고찰이다. 그러나 세상인심은 이렇게 좋은 명당자리를 그냥 둘 리가 없어, 조선후기에 명문가로 유명한 풍양 조씨 가문에서 묘 자리를 쓰려고 절을 폐사시켰다고 한다. 현재의 용봉사는 옛 절터에서 벗어나 오늘도 여전히 용봉이라는 이름값을 하며 그 위용을 자랑하지만, 이곳에 해악을 끼쳤던 집안은 그 후 손이 끊겨 제사를 잇지 못한다고 한다. 이 또한 불가의 인연법과 깊이 연관된다 할 것이다. 따라서 용봉사에 갈 때에는 이곳에 있는 성보문화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찾아가길 권한다. 아울러 이 사찰에 가서는 이곳을 욕심내었던 이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발 디디고 서 있는 곳에서 불교의 인연을 느껴보도록 권한다.

(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홍성IC에서 나와 갈산교차로에서 홍성, 청양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29번 국도를 타고 홍성시내까지 가면 좌측에 홍주문화회관이 보이고 홍주사거리가 나온다. 예산, 아산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길을 따라가다 소향 삼거리에서 우측방향으로 계속 직진해서 달리다 보면 덕산동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덕산, 합덕방향으로 좌회전을 해서 609번 지방도로를 타고 5km 정도 가면 좌측에 용봉산과 용봉사 표지판이 보인다. 좌회전을 해서 들어가면 주차장과 용봉산 입구가 나오고 걸어서 5분정도 산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용봉사 일주문이 나온다.

용봉사 영산회괘불탱   (보물          제 1262 호 1997.08.08)

용봉사지 석조         (도 문화재자료 제 0162 호 1984.05.17)

용봉사 마애불         (도 유형문화재 제 0118 호 1985.07.19)

용봉사 부도           (도 문화재자료 제 0168 호 1984.05.17)


03 정암사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63

정암사의 창건과 연혁을 전하는 자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사중에서는 백제 성왕 5년(527)의 창건설을 내세우고 있으나 그 근거를 찾기 어렵다. 오직 여지도서, 결성현 조에 수록된 단편적인 기록, 즉 정암사는 오서산에 있다. 그리고 오서산은 홍산으로부터 백월산으로 이어져 횡으로 둘러지면서 홍주, 결성, 보령 3읍의 경계를 이룬다. 는 내용을 통해 18세기 중엽의 존재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가람고에도 결성현의 동쪽 28리 지점에 정암사를 정암사가 있다. 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오서산의 정암사를 지칭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옛금당지의 초선들은 한변의 크기가 70-80c

m인 방형의 자연 초석을 사용하였는데, 중간에 간혹 결실되기는 하였지만 정연하게 남아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옛 금당지는 정북향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앞으로 옛 금당지로 알려진 터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정암사의 역사를 추정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가는 길 )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광천IC로 나와 광천읍 방향으로 96번 지방도로를 타고 2km 정도 가면 단아래 사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보령, 서천 방향으로 우회전 하여 21번 국도를 타고 천수만교를 지나 4km 정도 가면 진죽 교차로가 나온다. 여기서 청소, 오천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여 1km 정도 가면 좌측에 청소역이 있고 우측에 보이는 청소 면사무소를 지나 좌회전하여 610번 지방도로를 따라 10km 정도 가면 용두 삼거리가 나오고 좌회전하여 1.2km 정도 더 가면 아랫장밭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에서 명대계곡, 오서산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5.2km 길을 따라 가면 홍성에서 제일 높은 산인 오서산의 입구와 주차장이 나오고 등산로가 시작된다. 등산로를 따라 산을 오르면 홍성이 한눈에 들어오고 정암사 범종각이 제일먼저 눈에 들어온다.


04 석련사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182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백월산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석련사는 멀리서도 잘 보이는 그런 곳이다. 가는 길은 포장이 잘 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산길은 백월산의 풍광이 한 눈에 각인되는 그런 곳이다. 낮으막하나 정겨워 드라이브 코스로 알맞다. 따스한 봄볕을 받고 있는 산길에는 아직 솔잎이 깔려 있어 폭신하다. 그러다 석련사에 도착하면 정갈한 경내 모습에 부처님을 향한 환희심이 넘쳐 난다. 높은 석축 위에 위치한 대웅전과 그 옆에 그림처럼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가 말없이 석련사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시원한 바람이 귀를 간질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을 느끼며, 그 나무에 기대서면 갑자기 두 눈이 동그래지면서 두 손을 합장하게 된다. 사찰 앞 백월산의 우거진 나무 때문에 드문드문 보이는 홍성의 활기찬 모습이 보이고,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면 시야를 탁 트이게 하는 환상적인 호수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석련사에서 내려다보는 도심과 자연의 풍광이 아름답다. 대웅전에서 조금 더 산 위로 오르다보면 근래에 마애불이 조성되어 있다. 이 마애불에서는 돌에 낀 이끼라든지 세월의 두께가 더께더께 붙은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그곳에 그 부처님을 모신 사람들의 믿음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그곳에서 다시한번 더 산 아래를 내려 보면 가슴 속에 환하게 열리는 느낌이다. 이렇게 석련사에 오면 도심에서 멀지 않은 사찰이면서도 산사의 높이감과 믿음의 깊이 감을 함께 만끽할 수 있어 좋다. 알맞은 곳에 딱 그만큼의 법당과 석물이 절집을 찾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홍성IC에서 나와 갈산교차로에서 홍성, 청양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29번 국도를 타고 4.6km 정도 가면 왼편에 구항면이 나온다. 구항교차로를 지나 유턴을 해서 구항교차로 우측으로 나와 직진해서 1.5km 정도 시골길을 따라가면 우측에 오봉리와 석련사 표지판이 나오고 우회전하여 길을 따라 들어가면 석련사가 나온다.


05 구절암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 산 101 

자연 암벽에 크게 새긴 이 마애불은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약간 기울어진 상태이다. 머리에는 구슬로 장식된 관을 쓰고 있으며 눈썹 사이에는 동그란 백호가 뚜렷이 새겨졌고 손과 발은 명확히 표현되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마애불들이 거의 서 있는 모습인데 비해 이 마애불만은 연꽃모양의 대좌 위에 앉아 있어 특이하다. 형태가 특이한 보기 드문 작품으로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이전으로 추정된다.

구절암 마애불   (도 문화재자료 제 361 호 1998.07.25)

( 가는 길 )

홍성 시내에서 21번 국도의 넓은 길을 따라 광천 쪽으로 신나게 달린다. 홍성남부우회도로를 따라 구황농공단지와 학계야영장을 지나고 구황농협창고에서 우회전하면 편도 1차선의 농로와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조금 가면 대정초등학교가 나오고,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지석마을을 따라가다가 1lm 정도 가면 지석마을회관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1.3km 정도 꼬불꼬불한 농로를 지나간다. 유난히 많은 공동묘지를 지나면 이제 비포장도로가 나타난다. 길을 가는 차는 도로에 깔린 자갈이나 돌멩이에 걸려 이리저리 쏠리고 덜컹거리며 힘겨워한다. 그다지 멀지 않은 절간까지 가는 길이 유난히 험난하다. 어느 정도 가면 이제 가파른 경사길이 나오면서 절은 아직도 멀었다. 높은 하늘 아래에 위치한 사찰은 아득하고 멀기만 한다. 포장된 도로도 여기저기 패여 있어서 차가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찻길이 꼬불거리고 가파라 힘이 들고 절을 찾아가야 하는 마음은 바쁘며, 또 갈 길이 멀게 느껴지지만 산사에 도착하자마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06 산혜암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산 1

산혜암은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의 동쪽 사면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홍성의 진산인 백월산에 있어 홍성읍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이므로 비교적 인근 주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흰 달이 산 위에 둥실 떠 있듯이 높은 석축이 특징적인 절, 산혜암이 바로 그곳에 있다. 시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는 꽤 높은 산으로 여기는 백월산의 울창한 수목 덕분에 산혜암을 찾아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구불구불한 길에 이정표가 그닥 많지 않고 인기척도 없어 가다쉬다를 반복해야 한다. 가면서 만나 후두둑 날아 오르는 산새와 친구해야 하고, 차소리에 놀라 달아나는 다람쥐나 청설모도 자주 보게 된다. 저만큼 절이 보이면 절집보다 먼저 높고 웅장한 108 석축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산중에 저런 석축을 쌓으려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수고했을까? 부처님과 인연 닿은 이들이 한돌 한돌 공들여서 쌓아올렸을 것이라는 생각에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게다가 이 석축을 보면 예전에 이곳이 홍성을 지키는 산성으로 사용되었을 때의 모습까지 엿보인다. 그만큼 산혜암은 이 지역을 수호하는 진산으로서 기능하는 백월산의 정기가 모아진 곳이라 여겨진다. 고찰의 면모를 보여줄 성보문화재는 없지만, 대웅전 앞 뜰에서 홍성시내를 내려다 보면 이마를 스치는 청량한 바람 덕분에 속세의 찌든 때를 말끔히 씻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때 마침 풍경소리를 따라 부처님을 향한 염불소리까지 들리는 듯한 그런 분위기를 느껴보게 되는 그런 곳이다.

( 가는 길 )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해미I.C에서 한서대학교방면으로 나온 후 45번 국도를 따라 오른편에 산수지를 끼고 한서대학교를 지난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덕산 휴게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간단히 요기(곰탕과 잔치국수가 맛있다.)를 하고 600m가량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우측에 고건축박물관과 수덕사 표지판이 나온다. 우회전을 해서 계속 직진을 하면 우측에 고건축박물관을 지나게 된다. 삼거리에서 7km 정도 가면 되는데 까치고개를 지나 미력골 고개를 지나갈 때 우측으로 산혜암 표지판이 보이는데 우회전을 해서 들어가면 차가 1대 지나갈 수 있는 등산로가 나오게 된다.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돌로 높게 쌓아올린 석축위로 산혜암이 자리 잡고 있다.


07 광경사지   홍성군 홍성읍 내법리 178  

광경사의 옛 터에 당간지주와 함께 남아 있는 삼층 석탑으로, 1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중앙과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 떠 새겼다. 탑신의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렸는데, 1층 몸돌이 큰 것에 비해 2·3층 몸돌의 높이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며,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고 고려시대 작품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광경사지에 있는 석불좌상(도 문화재자료 제159호)는 원래는 홍성읍 대교리 광경사에 있었던 것으로 1975년 홍성군 홍성읍 내법리 용주사로 이전하였다. 화강암으로 만든 이 불상은 머리의 조각이 분명하지 않고,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도 작은 편이다. 둥근 얼굴에서는 사실미가 흐르며, 직선으로 뻗어나간 두 눈은 진주로 눈동자를 끼웠던 흔적이 보인다.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가 있으며, 옷주름은 평행의 단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의 수법과 비슷하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에는 연꽃잎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광경사지 삼층석탑   (도 문화재자료 제 159 호 1984.05.17)

광경사지 석불좌상   (도 문화재자료 제 161 호 1984.05.17) 


08 홍주성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98 일원   (사적 제 231 호 1972.10.14)

( 자료 - 별도 )


09 신금성  홍성군 결성면 금곡리 228   (도 기념물 제 149 호 1998.07.28)

( 자료 - 1 )

신금성은 해발 40-60m의 평지에 가까운 낮은 구릉에 쌓은 성으로, 안쪽의 내성과 바깥쪽의 외성으로 구분되는 2중성이다. 전체 성벽의 길이는 645m, 높이는 2-3m이다. 성벽은 북·서·남쪽이 가장 잘 남아있는데, 북쪽과 남쪽에는 문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에서는 토기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평탄한 구릉에 쌓여져 평지성에 가까운 이 성은 방어용보다는 지역 집단을 통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지방 소재지의 일종으로 읍성의 형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여겨진다.

( 자료 - 2 )

홍성 신금성(면적 45,852㎡, 전체길이 645m, 높이 23m)은 홍성군 결성면 금곡리에 위치해 있으며 평지에 가까운 낮은 구릉에 쌓은 성으로, 안쪽의 내성과 바깥쪽의 외성으로 구분되는 2중성이다. 성벽은 북&서&남쪽이 가장 잘 남아있는데, 북쪽과 남쪽에는 문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에서는 토기 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평탄한 구릉에 쌓여져 평지성에 가까운 이 성은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어 방어용보다는 지역 집단을 통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지방 소재지의 일종으로 읍성의 형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여겨진다. 출토 유물이나 성의 구조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토성으로 추정된다. 

10 송암리 산성  

홍성읍 소재지에서 동편으로 약 3km 떨어진 거리에 금마면 장성리와 송암리 사이로 136m의 퇴뫼산이 있으며, 산성은 퇴뫼산의 정상부에서 약 5-10m의 하단부에 이르기까지 테뫼식으로 축조되었다. 송암리 산성은 인접한 구룡리 산성과 더불어 홍성-예산 간의 방어에 유리한 위치로서 현재의 홍성읍을 관망하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송암리 산성은 정상부의 평탄한 대지를 중심으로 성곽이 돌려지면서 그 밑으로 다시 평탄지를 둘러싸고 있어 자연스럽게 이중성과 같은 구조를 보인다. 정상부의 성벽은 토축으로 내부의 흙을 파내어 성벽을 만들었고, 둘레는 약 170m정도이며, 정상부에는 평탄한 지형이 조성되어 있다. 정상부의 아래 쪽 으로는 먼저 돌로 성벽을 쌓고, 안쪽으로는 흙을 채워 넣는 내탁의 방식에 의한 석축을 하였다. 따라서 성벽의 안쪽에는 폭 4-5m 정도의 평탄지가 조성되었으며, 이를 기준으로 한 전체 둘레는 약 300m 가량 된다. 한편 북쪽의 성벽 아래로 다시 5m정도 지점에 넓은 평탄지가 조성되어 잇고, 다량의 기와편이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성의 북쪽으로는 높이 약 6m, 길이 20m의 반원형의 석루가 남아있으며, 아마도 성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였던 연지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정상부의 능선이 완만하게 뻗어 내린 남단부와 북단부의 성벽 바깥 부분에는 각기 능선의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깍아 내어 호를 만든 흔적이 3-4단씩 남아있다. 성안에서 출토되는 유물로는 기와 편과 토기편이 있는데, 기와 편은 선조문과 어골문이 주류를 이룬다.


11 사시라 성  

삽천-금마천변에 있는 토성. 그 남록에 지석묘 5기가 있고, 이어서 마제석검 등이 출토되었다. 고모루성, 신금성 등과 동일시대인 마한시대의 토성으로서 그 위치로 미루어 위 두 성뿐 아니라 참뱅이 성과도 깊은 연고가 있었을 것이다.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략하던 때, 남천정(현재 경기도 이천)에 머물던 무열왕 김춘추는 이 성으로 옮겨와 대기하다가 사비성이 함락한 다음 합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덕적도로 당장 소정방을 영접 나갔던 신라의 군선을 이용하여, 천수만을 통하여 이동하였다고 볼 때 가능한 일이다.


12 임존성   홍성군 금마면 봉서리 &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일원   (사적 제 90 호 1963.01.21)

( 백제 부흥군의 핵심 주력성으로 전해지는 거성 )

홍성군 금마면 봉서리와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광시면 동산리의 경계를 이르는 봉수산 산정에 위치한다. 백제의 수도가 한성으로부터 공주와 부여로 옮겨옴에 따라 서부 방어선의 요지로 등장하게 되었고, 특히 백제멸망과 동시에 그 유민에 의하여 전개된 조국 부흥 전에 있어 주류성과 더불어 그 핵심을 이룬 거성이다. 


13 해풍현성

( 후백제와 고려의 대군이 결전을 치른 성 )

홍주의 주산인 동록, 중복, 산혜암(일명 : 월산사) 부근에 있는 석성이다. 고려 초 후백제의 견훤( ?-936)의 대군과 왕건(877-943)의 대군이 결전을 하여, 고려군이 승전을 거둔 곳이다. 해풍현은 고려 때의 현으로써 6대 성종 12년부터 명종 25년(1195)까지 202년 동안 그 관아는 홍성읍 월산리 '관청재'부락에 있었다고 한다. 한자 4자의 명이 들은 동경과 연적이 출토된 바 있다. 그 후 현 홍성읍 성 쪽으로 이전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여지승람 : 둘레가 9,700척 이라 기록되어 있다.) 1973년 홍성군은 사적표석을 세웠다. 


14 주류성 (장곡 산성)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산 28   (도 문화재자료 제 360 호 1998.07.25)

( 자료 - 1 )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해발 255.5m의 산에 쌓은 성으로, 주류성 또는 장곡산성이라고 하며, 성 둘레는 약 1,352m이다. 산성리 주변은 지세가 험하고 계곡이 좁아, 군사상 요충지로 적합한 지형을 갖추고 있는 곳으로, 옛 백제 부흥군의 거점이 되는 예산 대흥 임존성(사적 제90호)과는 12.6km, 당진 혜성과는 37km, 청양 정산의 두륭융성 과는 23km, 공주와는 34.5km, 부여와는 27km의 거리를 두고 있는 곳이다. 장곡 산성 주위에는 학성산성, 태봉산성, 소구니 산성이 띠를 이루듯 이어져 있어, 지리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산성은 동굴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산성 안에서 건물터의 주춧돌, 기와 조각, 토기 류가 발견되었다. 이 지역 주변에서도 사시, 사시량, 사라라 새긴 기와 조각과 문초석, 돌덧널무덤(석곽묘)에서 발견된 청동제 방울, 백제 토기 류 등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장곡 산성은 백제 사시량현의 정치, 행정적 중심역할을 하던 곳으로 추정되며, 지형적 조건으로 보아 백제 부흥군의 거점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자료 - 2 )

장곡산성의 위치인 산성리 주변은 지세가 험하고 계곡이 좁아, 군사상 요충지로 적합한 지형을 갖추고 있는 곳으로 지리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산성은 동굴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산성 안에서 건물터의 주춧돌, 기와 조각, 토기류가 발견되었다. 이 지역 주변에서도 '사시', '사시량', '사라'라 새긴 기와조각과 문초석, 돌덧널무덤에서 발견된 청동제 방울, 백제 토기류 등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장곡산성은 백제 사시량현의 정치, 행정적 중심역할을 하던 곳으로 추정되며, 지형적 조건으로 보아 백제 부흥군의 거점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자료 - 3 )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장곡산성은 백제 사시량현의 주성으로 인식되며 백제 부흥군의 웅거지인 주류성으로 추정되어 상명대 박물관에서 자료조사 등을 벌이고 있다. 660년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군의 수도로 풍왕, 복신 장군등이 이곳에서 활약했으며 663년 왜군과 연합하여 나.당 연합군과 싸우다 성이 함락되어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백제인의 한이 깃든 백제인의 성소이다. 신라말기의 대학자인 고운, 최지원의 금석문과 은거지가 있는 인근 장곡면 월계리 용연계곡도 가볼만하다.


15 결성읍성   홍성군 결성면 읍내리 산 28   (도 기념물 제 165 호 2004.04.10)

결성읍성은 치소를 석당산성으로 옮긴 후 51년만인 1451년에 완축 하였고 세종실록지리지와 신동국여지승람, 충청도읍지, 여지도서 등에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규모는 성 주위 약 1,007m(3,325척)이며, 성벽높이 내측 약 2-3m, 외측 약 3-6m이고, 성벽 기저부 폭 약 4.5m이다. 성을 개축하면서 구간마다 도내 각읍이 나누어 쌓은 것을 표시한 아산 지역의 기각역축 기록이 북쪽 성벽에 남아 있다. 읍성 내에는 17개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헌, 형방청, 책실이 남아 있다. 홍성 결성읍성은 원래의 결성현 치소였던 석당산성 대부분을 포용하며 넓혀 쌓은 읍성으로서 조선조 읍성연구와 결성면의 역사성을 밝히는 역사적·학술적 중요 자료이다. 


16 한용운 선생 생가지   홍성군 갈산면 성곡리 492   (도 기념물 제 75 호 1989.12.29)

( 자료 - 1 )

승려이며 시인인 한용운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낮은 야산을 등진 양지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생가가 쓰러져 없어진 것을 1992년에 복원하였다. 가옥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초가인데 양 옆으로 1칸을 달아내어 광과 헛간으로 사용하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로 둘렀으며 바깥에 흙벽돌로 화장실을 만들었다. 한용운 선생의 애민애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이곳에 표석을 설치하였다. 한용운 영정사진을 모셔놓은 사당도 있다.

( 자료 - 2 )

토굴새우젓으로 소문난 홍성군 광천읍 외곽도로 사거리에서 우회전, 천수만 방면으로 향해 가다보면 결성면 소재지가 나온다. 결성우체국 앞에 이르러 우측으로 심하게 굽은 도로를 따라가면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에 닿게 된다. 양옆으로 과수원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한가로운 길에다가 안내판도 잘 되어 있어, 생가를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초가집 두어 채가 보이는데 바로 한 용운 생가이다. 주차장을 지나자마자 오른편에는 생가 터 안내문, 왼편에는 초가로 지어진 관리사무 소가 있다. 싸릿대 울타리로 복원된 만해선생의 생가는 초가지붕을 얹었으며 방2칸, 부엌 1칸으로 구성된 일자형 구조로 한용운이란 문패가 걸려있어, 생전의 만해선생 이 마치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듯한 감상에 빠져든다. 댓돌이며 툇마루가 한없이 정 겹고 우물과 장독대를 돌아 집 뒤 야산 언덕배기를 올려보면 적송과 조릿대가 자란 다. 슬쩍 방 안을 기웃거리자니 만해의 영정과 앉은뱅이책상 하나가 쓸쓸히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부엌 옆은 장작을 쌓아두는 헛간이고 사랑방 옆은 절구통과 맷돌 이 보관된 헛간이다. 마당을 둘러보면 작은 연못과 정자가 들어서있다. 오석에 새겨진 만해의 시 나룻배 와 행인은 방문자들의 발걸음을 잠시 그 자리에 묶어둔다. 생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위패와 영정을 모신 만해사라는 사당이 있어, 다시 금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1879년 이곳 성곡리에서 태어난 한용운 선생은 6세부터 성곡리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워 9세에 문리를 통달, 신동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26세에 강원도 백담사에 들어가 불문에 입도. 삼일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내면서 저항 문학에 앞장섰는가 하면, 불교개혁운동에 일생을 바쳤으며 1944년 6월 69세의 나이로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했다. 만해의 동상은 홍성읍내에서 보령으로 내려가는 21번 국도변에 있는데, 생가 방문 후 들러보길 권한다.

- 한용운 (1879-1944)

한용운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한응준과 온양인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에서 출생하였다. 1885년 아버지를 따라 홍성읍 남문동으로 이사한 것은 당시 7세 때의 일이고 9세 때에 '기삼백주'와 '서상기'를 읽을 수 있었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천재니 신동이니 하는 평이 있었다. 1892년 13세에 홍성읍 학계리에서 사는 전영주의 셋째 딸 정숙과 결혼하였다. 1896년 김복한, 이설 등이 일으킨 을미홍주의병에 가담하였다가 의거가 실패하자 1897년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 등지를 전전하였다. 이후 시베리아와 만주를 주유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수개월간 머물다 1904년 백담사로 출가하였다. 백담사에 갔을 때에 첫아들 보국이 출생하였다. 1905년 백담사에서 김연곡화상에게서 견성득도를 하였으며, 이름을 고쳐 법명을 용운이라 하고 호를 만해라 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에 건너가 각지를 돌아다니며 외국의 문물을 살피고, 우리나라 유학생들과도 사귈 기회를 가졌는데 이때 최린과 특별한 교분을 갖게 되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사찰령을 공포하고 우리나라의 불교를 일본 불교에 예속시키는 동시에 사찰에 대한 권리를 장악하려 하였다. 한용운 선생은 박한영등과 손을 잡고 반대 운동을 벌여 이를 분쇄하는 한편 불교의 유신론을 제창하고 불교대전을 제정하여 불교의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1918년에는 월간잡지 '유심'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일본에 있는 우리 유학생들이 2월 8일 독립선언을 한데 이어 국내에서도 손병희, 최린 등 33인의 민족대표로 독립을 선언하는데 주동적 활동을 하였다. 그는 선언서에 공약삼장을 첨거 하였고 명월관 지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변호인과 사식, 보석을 거부하고 3년의 형기를 마치는 중에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써 독립선언서와 같이 쌍벽을 이루는 명문을 남겼다. 1926년에 다시 설악산에 들어가 '님의 침묵'이라는 88편으로 된 시집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도 앞장섰다. 1927년 신간회를 조직하여 집행위원 겸 경성지부장에 선임되었고, 1931년에는 '불교'라는 월간잡지사에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33년 보령출생의 유숙원과 재혼하였고 다음해 딸 영숙이 태어났다. 1935년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1936년 '후회'라는 장편소설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다. 1938년 불교계의 지하 독립운동 단체인 만당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43년 일제가 우리의 청년학도들을 학도병이나 지원병으로 데려가는 것을 반대하였고 배급하는 쌀을 받지 않았다.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고 묘지는 망우리 정상에 유씨와 같이 쌍봉으로 안장되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전 생애를 통하여 일제와의 추호의 타협도 없었고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 6권이 간행되었다.


17 김좌진 장군 생가지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 외   (도 기념물 제 76 호 1989.12.29)

( 자료 - 1 )

백야 김좌진 장군이 살았던 곳이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광이 따로 있고 밖에는 마구간이 있다. 안채는 앞면 8칸·옆면 3칸의 기와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왼쪽부터 2칸 부엌이 있고, 아랫방과 윗방 각 한 칸씩 있으며, 통칸의 대청이 있다. 그 위에 방이 한 칸 있고 끝으로 툇마루가 있다. 방 앞으로 툇마루가 있는데 맨 끝방 주위에는 툇마루를 한 칸 높여 누각처럼 만들었다. 마당 한쪽에 우물이 있으며 밖에 있는 마구간은 화장실과 마구를 3칸 집에 만들었다. 터만 남아 있던 곳에 1992년에 안채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였다. 생가지에는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 자료 - 2 )

백야 김좌진 장군이 태어나 살았던 곳으로 터만 남아 있었으나 1992년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어 생가지와 문간채·사랑채가 복원되었으며 관리사 및 전시관이 건립되었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광이 따로 있고, 밖에는 마구간이 있다. 안채는 앞면 8칸 옆면 3칸의 기와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왼쪽부터 2칸 부엌이 있고, 아랫방과 윗방 각 한 칸씩 있으며, 통칸의 대청이 있다. 그 위에 방이 한 칸 있고, 끝으로 툇마루가 있다. 방 앞으로 툇마루가 있는데 맨 끝 방 주위에는 툇마루를 한 칸 높여 누각처럼 만들었다. 마당 한쪽에 우물이 있으며 밖에 있는 마구간은 화장실과 마구를 3칸 집에 만들었다. 이곳은 장군의 나라사랑 정신을 배울 수 있는 도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장군의 생가답지 않게 소박하고 단정한 멋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군 장군의 청아하고 꼿꼿한 정신이 살아있는 곳이다. 또한 김좌진 장군 사당(백야사)는 1998년-2001년까지 성역화사업 추진으로 2,880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내·외삼문, 재실, 주차장 등을 조성하였으며 매년 음력 12월 2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김좌진 장군 비   (도 문화재자료 제 167 호 1984.05.17)

( 가는 길 )

- 대전 방향에서 올 때

(1)대전->유성->공주->청양->홍성->갈산교차로->김좌진 생가지(기념관)

(2)대전IC->서 평택JC->안성JC->홍성IC->갈산교차로->김좌진 생가지(기념관) 

- 서울 방향에서 올 때

서울->서해안 고속도로->홍성IC(갈산교차로)->김좌진 생가지(기념관)

- 김좌진 (1889-1930)

( 자료 - 1 )

김좌진 장군은 홍성 출신으로 대한제국 후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청년학우회 등의 간부를 지냈고, 1913년에 대한제국 광복단에 가입하여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한 후 1917년 만주로 망명하였는데, 이후 13년간 평생을 항일전투에 몸 바쳤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는데 이것이 독립 전투상 승리의 금자탑을 세운 일로 기록되는 청산리전투이다. 1929년 정신, 이붕해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주석에 취임하고,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했다. 한편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공산당원의 흉탄에 순절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으며 홍성역 앞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 자료 - 2 )

본관 안동. 자 명여. 호 백야. 홍성출생. 형규의 2남이다. 부유한 명문대가 출신으로 15세 때 전답을 무상으로 분배하고 가노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을 정리하여 호명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이념의 근대교육운동을 주로 하였다. 그 후 기호흥학회홍주지회에 참여 하였으며, 1910년 서울에서 이창양행이라는 위장상점과 신의주 염직회사를 설립 해외와의 연락거점을 삼았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ㆍ투옥되어 2년 6개월간 복역하였고, 1915년 노백린ㆍ신현대 등과 함께 대한 광복회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독립 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에 두고 5분단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년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21-26일 청산리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참모부장)ㆍ박영희(부관)ㆍ이범석(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ㆍ천수평ㆍ어랑촌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차례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여명을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 전투라 하여 봉오동 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가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 도독부군이 최진동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 겸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 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8 엄찬 고택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29   (중요민속자료 제 231 호 1996.02.09)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 분인 성삼문의 외손 엄찬의 고택이라 전하는 옛집이다. 1670년대에 지었다고 전하며, 지금은 연고가 없는 개인의 소유가 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집에서 조선 현종 13년(1672)부터 숙종 2년(1676)까지 4년간 성삼문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하였다고 한다. 또 성삼문의 둘째 딸이 제사를 올렸다고 전하기도 하여 이 건물은 그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처음 지을 당시에는 문간채·안채 등이 갖추어진 집이었으나, 지금은 문간채가 남아있지 않다. 약간 높은 대지에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ㅁ자형으로 지었다. 본채는 북쪽은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나머지 동서남쪽 부분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과 앞면이 사디리꼴 모양인 우진각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벽은 옛날대로 흙벽을 유지하고 있으며, 건물의 일부가 허물어졌으나 중요한 부분은 잘 남아있다. 일부 개조된 부분이 있지만 조선 시대의 특징 있는 구조양식과 주거생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전통가옥으로 중요하다. 또한 이 마을에는 성삼문의 위패를 모신 노은단과 노은서원유허비 등이 있으며, 도 지정 전통문화보존마을로 관리되고 있다.


19 조응식 가옥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중요민속자료 제 198 호 1984.12.24)

(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전통가옥 )

조선시대말기에 지어진 이 집은 소나무 숲이 우거진 야산이 감싸고도는 곳에 남향으로 자리한 집으로,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입구에도 소나무 숲을 조성하였고, 집 앞에는 연못을 만들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어놓았다. 솟을대문을 낸 -자형의 행랑채 뒤에 -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의 왼쪽 끝에는 중문이 연결되어 있다. 중문을 들어서서 동쪽으로 꺾어 돌아가면 ㄱ자형의 안채가 있고 동쪽에 안마당을 감싸며 -자형의 광채가 자리한다. 이와는 별도의 축으로 광채 뒤편에 -자형의 안사랑채를 배치하고 있는데, 담장을 두르고 대문을 따로 내었다. 안사랑채 왼쪽 뒤편은 안채와 통할 수 있도록 터놓았다. 안채에는 중부지방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관행으로 사랑방을 두었다.


20 김우열 가옥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234   (도 민속자료 제 10 호 1985.12.31)

( 자료 - 1 )

안채, 사랑채, 헛간채를 가지고 있는 19세기 후반의 가옥으로, 전체적으로 트인 ㅁ자형 배치를 보인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가운데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과 안방, 오른쪽에 건넌방이 배치된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평면구성이다. 안채의 남쪽에 -자형으로 자리 잡은 사랑채는 왼쪽에 대문과 문간방을 두고 오른쪽에 대청과 사랑방을 두어 행랑채를 겸하고 있다. 조선 후기 세련된 건축기술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주택이다.

( 자료 - 2 )

이 건물은 19세기 후반에 세워진 주택으로 안채, 사랑채, 헛간채 세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세 건물이 각각 독립되어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룬 집이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가운데에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과 부엌, 오른쪽에 건너방을 두고 대청과 건너 방 앞으로 툇마루 둔 전형적인 중부 지방의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


21 전용일 가옥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326   (도 민속자료 제 11 호 1985.12.31)

( 자료 - 1 )

처음 세웠을 때 이 집은 99칸 규모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을 갖춘 큰 집이었으나 현재는 28칸 정도의 안채만 남아 있다. 여러 가지 건축기법으로 보아 1800년대 중반에 지은 건물로 추정한다. 대청과 온돌방을 중심으로 좌우로 방들이 이어져 있고 앞면에 중문채가 있으며, 안채 왼쪽에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 앞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 주변 건물에는 팔각돌 기둥을 세웠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돌기둥만 갈산중학교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중부지방의 특색과 조선 후기의 세련된 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는 집이다.

( 자료 - 2 )

이 건물은 처음 세워질 때 99칸 반 규모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을 갖춘 부농형의 주택이었으나, 지금은 안채 28칸 정도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건축연대는 대체로 180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안채는 가운데 대청과 온돌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들이 이어져 남쪽으로 뻗으면서 전체적으로 ㄷ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앞면에 중문채가 접속되어 있다. 부재가 크고 가공이 정밀히 되어 조선 말기의 건축기술 수준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안채 왼쪽에 사랑채가 있고 그 앞에 연못이 있으며, 연못 주변에 있던 건물에는 팔각형 돌기둥을 세웠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돌기둥만은 현재 갈산중학교 교정에 옮겨놓은 채로 있다.

( 자료 - 3 )

이 건물은 처음 세워질 때 99칸 규모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등을 갖춘 주택이었으나, 지금은 안채 38칸 정도만 남아있으며, 건축연대는 대체로 180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안채는 중앙에 대청과 온돌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들이 이어져 남쪽으로 뻗으면서 전체적으로 ㄷ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앞면에 중문채가 접속되어 있으며, 갈산면 상촌리에 위치하고 있다.


22 홍성고등학교 강당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등록문화재 제 272 호 2006.09.19)

1943년에 건립되어 당시 홍성공립중학교의 강당으로 쓰인 건물로 강당내부의 창문틀과 그 주변은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단상 위 가운데는 벽감이 있으며 이 벽감은 현재 무궁화와 태극으로 꾸며져 있으나 본래에는 일제의 상징으로 꾸며져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즉 이 벽감은 일제강점기 때 학교 건물에서 보이는 봉안소로서, 당시에는 이 앞에서 교육칙어를 낭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가 남아 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 


23 상하리 미륵불   홍성군 홍북면 상하리 산 1   (도 유형문화재 제 87 호 1979.07.03)

( 자료 - 1 )

이 거대한 마애불은 민머리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하고 낮은 코, 비교적 작은 입이 평면적으로 표현되었고, 입가의 희미한 미소가 부드러운 인상을 풍긴다. 신체 역시 입체감 없이 평면적인데, 두 손을 아래위로 나란히 대고 있는 것만 표현했을 뿐 다른 것은 거의 생략되었다. 지방양식을 잘 드러내고 있는 관촉사 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 등 충청도 일원 지방에 남아 있는 거대한 불상들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인다.

( 자료 - 2 )

거대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조각한 이석불은 고려시대의 토속적인 지방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소발의 머리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하고 낮은 코, 비교적 작은 입 등이 얕게 부조되어 평면적이고 양감을 주지 않지만 입가에 표현된 희미한 미소는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얼굴에 부드러움을 느끼게 한다. 신체는 얼굴에 비해 더욱 평면적이어서 가슴부근에 두 손을 아래, 위로 나란히 대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조각은 거의 생략되었다. 이 불상과 같이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불신을 조각하는 수법은 안동 이천동 석불상, 파주 용미리 석불상등 같은 시대의 불상에 자주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풍기는 토속적인 지방양식은 관촉사 미륵보살입상이나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괴산미륵리석불 입상 등 충남도 지방에 나타나는 일련의 거상양식과는 일맥상통 한다고 볼 수 있다.


24 용봉산 마애불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용봉산   (도 유형문화재 제 118 호 1985.07.19)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용봉사 입구의 서쪽에 서 있는 바위에 돋을 새김한 불상이다. 바위를 불상 모양보다 크게 파내고 조각하였는데 마멸이 심하다. 머리 부분은 뚜렷하게 돌출 되었으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안정되어 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고, 얼굴은 타원형으로 양감 있게 표현하였다. 눈과 입은 얼굴에 비해 가늘지만 흐뭇한 미소가 번져 있어 8세기 신라 불상의 이상적인 얼굴 특징이 많이 남아 있다. 귀는 거의 어깨에 닿을 만큼 길게 내려와 있으며, 목에는 3줄의 삼도가 있다. 신체는 양감이 부족하여 평판적 인데, U자형의 옷 주름은 매우 도식적이고 얕게 조각되어 더욱 평면적으로 보인다.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붙인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두 손이 몸에 비해 현저하게 작다. 딴 돌에 연꽃무늬 대좌를 새기고 거기에 두 발을 조각하였으나, 근래에 만든 공양석에 가려서 알 수 없다. 8세기의 이상적 사실주의가 엿보이면서도 9세기 불상 양식의 특징이 상당히 묘사되고 있어 9세기 불상 양식의 시작을 알려주는 좋은 예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불상의 왼쪽에 신라 소성왕 1년(799)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어 그 가치를 한결 높여준다.


25 신경리 마애석불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산 81   (보물 제 355 호 1963.01.21) 

( 자료 - 1 )

홍성군 용봉산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돌출된 바위 면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돋을새김으로 높이 4m의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다. 얼굴은 몸에 비해 크고 풍만하며, 잔잔한 미소가 흘러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목 밑에서는 굵직한 몇 가닥의 선으로 표현되었지만 아래쪽은 가느다란 선으로 도식화되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파낸 바위 면을 이용해 희미한 음각선으로 윤곽만을 나타냈다. 전체적으로 얼굴 윗부분은 입체감이 있고 원만한데 비해 아래로 내려갈수록 양감이 약해져 균형이 깨지고 있는 작품으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자료 - 2 )

바위면을 감실형으로 움푹 파내고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다. 전체적으로 머리 부분은 입체감이 있으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양감이 약해져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 통견의 법의에 새겨진 옷주름 역시 목 밑에서는 굵직한 몇 가닥의 선으로 표현되었지만 아래로 내려가면서 가는 음각 선으로 도식화되었다. 광배는 파낸 바위 면을 이용해 희미한 음각선으로 두광과 신광이 윤곽선만을 나타내었다. 얼굴은 인상이 풍만하고 원만할 뿐 아니라 신체의 비례도 좋은 편이나 간략하면서 도식화된 옷주름, 미숙한 조각수법 등에서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자료 - 3 )

이 석불은 백제 말기의 작품으로 추측되며 주위에서 백제 때 기와조각을 찾아 볼 수 있다. 높이 4m의 암석에 양각으로 된 이 석불은 그 수법이 경탄할 정도로 정교하며 앞면에 불상윤곽을 따라 감형을 이루면서 조각한 입상과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큼직하고 상호는 비대하다. 눈은 가늘고 코와 입은 작은 편이며, 귀는 길고, 짧은 목에 삼도가 뚜렷하다. 어깨는 직선인데 통견의 법의를 입었고 배 앞의 반원형 주름, 두 다리의 타원형 주름, 그 밑의 V자형 주름, 군의(치마) 자리의 간단한 주름등 모두 평면적이어서 박력이 없다. 오른손을 늘어뜨려서 옆에 붙이고 왼손은 가슴 앞에 들어서 시무외인같이 되었으나 손가락을 구부린 듯 하다. 광배는 음각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그렸고, 머리 위에는 방형의 별석을 얹어 놓았다. 석불의 규모는 몸높이 210cm, 머리높이 56cm, 얼굴높이 40cm, 어깨높이 67cm이다.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고대 백제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26 대교리 석불입상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408   (도 문화재자료 제 160 호 1984.05.17)

이 불상은 광경사지 미륵불이라고도 불린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고, 얼굴은 눈·코·입을 낮게 돋을새김 하였다. 주먹코와 두툼한 입술, 길 다란 눈 등이 매우 익살스러운 표정을 만들고 있다. 신체의 윤곽은 선으로 표현했으며, 앞면에만 조각을 하였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을 걸치고 있으며, 가슴에서 발까지 U자형의 옷 주름을 새겼다. 오른손은 가슴에 붙이고 왼손은 손바닥이 보이게 들고 있다. 조각수법이 거칠고 비례감각이 없는 점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27 홍주 의사총 (구백의 총)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124   (사적 제 431 호 2001.08.17) 

( 자료 - 1 )

조선조 구한말 홍성군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활동 가운데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수백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이다. 1905년 일본과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는데, 충청남도 홍성지방에서는 이조참판 민종식을 중심으로, 1906년 의병을 모아 남포와 보령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였으며, 3월 20일에는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의병 수백명이 전사하여 시체가 홍주천변과 남산 일대에 흩어져 방치되었다가 1949년에 항일의병의 유골임이 밝혀져 이곳에 모셔졌다. 홍주의병의 핵심적 연구 자료인 홍양일기, 홍양기사, 조선 최근사 등의 자료를 종합해 볼 때,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 전사자는 최소한 98인, 많게는 수백이라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묘는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고, 묘의 오른쪽에는 정인보가 짓고 심상직이 쓴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이 세워져 있다. 사당인 창의사에 900의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구백의총이라 했던 것을 1992년 '홍주의사 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매년 5월 30일 순국의사 추모제를 올리고 있으며, 을미의병으로부터 연면히 계승되어 온 한말 홍주의병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중요한 유적이다.

( 자료 - 2 )

홍주의사 총 (묘1기, 사방 9.5m, 높이 3m)은 조선말기(병오년) 홍성지역에서 있었던 의병운동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희생된 분들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박탈조약이 체결되자 이 홍주지역에서는 1906년(병오년)에 전 이조참판 민종식이 채광묵, 박인기, 이만식, 농민, 유생 구 관리를 중심으로 홍주성에 쳐들어갔는데 당시 홍성군수 이교석과 이주승도 처음에는 의병군에 호응할 기미였다가 일본군 다수가 입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성문을 닫고 입성을 막아 부득이 물러난 후 3월 22일에 재차 홍주성에 쳐들어갔으며 5월 19일에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그 후 일본군이 5월 25일부터 홍주성의 의병군을 공격하여 30일부터 본격전이 시작되었으며 그 때에 일본군 대포에 의해 조양문이 부서졌고, 중과부적으로 의병 수백명이 전사하여 시체가 대교리 일대의 냇가와 남산일대에 흩어져 있었다. 1949년 4월5일 현재 의사총이 있는 부근에서 식수하다가 의외로 많은 유골을 발견하여 옛 노인에게 설명을 듣고 병오 항일의병 때 전사한 의병군의 유골이 임시매장된 것으로 판명되어 충청남도에 그 사실을 보고하여 도비 300만환을 받아 유골을 모아 이곳에 합장하여 분묘를 조성하여 현재의 모습이 있게 하였다. 1992년 '구백의총'이란 이름을 '홍주 의사총'으로 바뀌었으며 매년 5월30일에 순국의사에 대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 자료 - 3 )

이곳은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참판 민종식이 중심이 된 의병이 홍주성에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다 순국한 수백 명의 유해가 합장되어 있는 묘소이다. 의병장 민종식은 1906년 3월 의병을 모아 남포와 보령 등지를 습격하여 병기를 확보하고, 충청 서부지역의 거점인 홍주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의병들은 일본군의 연속적인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격렬한 전투를 치른 끝에 5월 31일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수백 명의 의병들이 순절하였다. 이 싸움에서 희생된 의병들의 유해를 1949년 군민들이 이곳에 합장하였다.


28 결성향교   홍성군 결성면 읍내리 586   (도 기념물 제 134 호  1997.12.23)

결성 향교의 언제 지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고려 현종 1년(1010)에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인조 1년(1623)과 현종 15년(1674), 순조 8년(1808)에 수리하였고 1923년에 크게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건물 배치는 외삼문 없이 바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그 뒤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이외에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제기고, 홍살문, 내삼문들이 있다.


29 홍주향교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239   (도 기념물 제 135 호 1997.12.23)

이 향교를 처음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말에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태종 8년(1408)과 태종 18년(1418)에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뒤 몇 차례의 소실로 1924년에 크게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건물 배치는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뒤쪽에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이 있어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대성전 이외에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무와 서무·전사청·제기고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또한 축문을 태우는 망료대, 불을 밝히는 청료대, 손을 씻는 관수대 등의 석물이 남아 있는데, 이는 유교에서 예를 올릴 때 사용하는 것이다.


30 대원군 척화비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산 5   (도 문화재자료 제 163 호 1984.05.17)

( 충남 지방에 남아 있는 3기의 척화비중 하나 )

( 자료 - 1 )

척화비란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더욱 그러한 의지를 굳혀,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경계하여야 한다는 의지를 국민에게 심어주고자 서울 및 전국의 중요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홍성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넓적한 자연암석 위에 비 몸을 꽂아놓은 모습이다. 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을 할 수 밖에 없고, 화친을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라는 강한 어투의 경고 문구를 적어 놓았다. 고종 8년(1871)에 전국에 일제히 세운 것으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되면서 일제에 의해 대부분 철거되거나 훼손되었다. 이 비는 충남 지방에 남아 있는 3기의 척화비 (홍성-구항척화비, 아산-신창 척화비) 중 하나로, 급변하던 구한말 당시의 상황과 쇄국의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자료 - 2 )

고종 때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비석의 형태를 갖추지 않은 통비이다. 1866년 프랑스군대가 천주교 박해에 항의하여 인천까지 침입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대원군은 화친과 교역을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여 쇄국의 의지를 강하게 밝혔다. 그 후 1871년 평양에 무단 침입한 미국상선 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에서 미국과 조선 간에 격렬한 싸움이 있었는데(신미양요) 싸움에서 이겨 자신을 얻은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실각하여 청으로 쫓겨 가자 일본의 요구로 모두 철거했으나 충남지방에는 아산신창, 예산대흥의 것과 함께 3기가 남아 있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 할 수밖에 없고 화친을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라는 뜻이다.


31 홍가신 청란비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55   (도 문화재자료 제 165 호 1984.05.17)

홍가신이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후, 그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자 세워놓은 비이다. 비는 인조 19년(1641)에 세웠는데, 오랫동안 돌보지 못하여 파손된 것을 1973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홍가신 (1541-1615)

홍가신은 이순신 장군과 사돈 간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동요된 틈을 타서 왕의 종친이면서도 서자인 이몽학이 조선 선조 30년(1597)에 반란을 일으켜 홍주성을 쳐들어 왔다. 당시 홍가신은 홍주목사로 있으면서 난을 평정하였고, 그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봉해졌다.


32 복한 선생 효자비   홍성군 금마면 신곡리 211   (도 문화재자료 제 339 호 1995.10.07)

( 우리나라 최초의 효자비이다. )

조선 전기의 문신인 복한 선생의 효행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비각 안에 보호되어 있는 비는 표면에 새긴 조각양식이 독특하다. 비에는 단종 1년(1453)에 그의 효행을 담은 효자첩이 중국 대륙에까지 퍼져 세계만방에 효자로 칭찬을 받았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세조 4년(1458)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긴 그의 효행을 후세에 전하고자 세운 비이다.

- 복  한 (1350-1427)

조선 전기의 문신인 복한 선생은 고려 개국공신인 복지겸의 19대 손이며, 고려 후기의 충신이었던 복위룡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경학에 밝았으며, 세종 때에는 사헌부 감찰을 지내기도 하였다.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33 결성 동헌   홍성군 결성면 읍내리 279   (도 문화재자료 제 306 호 1989.04.20)

( 자료 - 1 )

조선시대 홍성지방 관리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곳. 행정업무를 처리하던 동헌과 치안업무를 처리하던 형방청, 책과 문서를 보관하면서 관리의 자제가 지내던 책실로 구성되어 있다. 동헌은 고려 말에 결성면 금곡리 분우 터에 있다가 정조 2년(1400)에 결성읍 산성 정상으로 옮겼다. 현종 6년(1665) 현재의 위치인 읍내리에 다시 지었고, 이후 여러 차례 고쳐지었다. 동헌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八)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형방청은 ㄱ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책실은 앞면 2칸·옆면 1칸 반 크기로,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인 우진각지붕이다.

( 자료 - 2 )

조선시대 관아 건물로 지방수령이 공사를 다루던 동헌, 순교가 지방치안을 담당했던 형방청, 책과 문서를 보관하면서 현감의 자제가 거처하던 책실이 있다. 동헌은 고려 말에 결성면 금곡리 분우 터에 있다가 1400년에 지금의 결성으로 읍을 옮겼을 때 읍의 산성 정상에 있었고, 1665년 현재의 위치에 재건한 이래 여러차례 고쳐지었다. 결성군이 홍주군과 통합하면서 현치소의 기능을 잃은 이후 다른 용도로 이용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 8작지붕집인데 지붕의 좌우 모양이 균제되지 않은 형상이다. 형방청은 ㄱ자 평면이며, 일제 때 지서 건물로 사용되었다. 책실은 정면 2칸, 측면 1칸반의 우진각 지붕이다. 이들 건물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가 최근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34 전운상 영정   홍성군 홍동면 신기리 822   (도 유형문화재 제 147 호 1995.10.07) 

조선 후기의 무신인 전운상(1694-1760)의 초상화이다.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선생의 초상화는 감색 조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전신좌상으로, 크기는 가로 88.0cm, 세로 136.5cm이다. 의자에는 호랑이 가죽이 덮혀 있고, 두 손은 옷 소매자락 안에 공손히 모아 두었으며, 가죽신을 신고 있는 발은 팔(八)자 모양으로 벌리고 있다. 관복은 호랑이무늬가 있는 흉배를 가슴에 붙이고 그 위에 허리띠를 둘렀다. 얼굴은 붉은색으로 엷게 칠하고 수염은 작은 붓으로 세밀하게 표현하였는데, 눈이 날카롭고 얼굴에 살이 없어 무인의 특징을 잘 담아내었다. 그린 이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한유도(도 문화재자료 제127호)와 그 솜씨가 같아서 한유도를 그렸던 화원 김희겸이 영조 16년(1740)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손상이 없고 보관상태도 양호하다.

- 전운상 (1694-1760)

전운상은 홍주위 영장 전시원의 아들로 자는 용백, 호는 자천으로,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전운상은 숙종 43년(1717) 24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함경도 부사로 있을 때 어진 정치를 베풀어 왕의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숙종 갑술년 3월 23일에 출생하였는데 용모가 출중하고 문무를 겸한 인재로서 정유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자년에 선전관이 되었다. 얼마후 판관에서 훈련어영천총부총관금위중군, 금위별장 등 여러직을 역임하고 춘천, 남양, 회령, 평양, 전라좌수사, 경상좌도병사, 삼도풍어사 등 여러 곳에서 봉직하였다.


35 성삼문 선생 (탄생지)유허지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114   (도 기념물 제 5 호 1973.12.24)

( 자료 - 1 )

성삼문 선생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그가 태어난 집터이다. 숙종 2년(1676)에 읍사 이량이 선생의 옛 집 근처에 사당을 세우고 사육신을 같이 모실 것을 청하자, 나라에서 녹운서원이라 하였고, 뒤에 노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매년 12월에 제사를 지내오다가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고, 후에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노은단이라고 하고 제사를 지냈다. 1954년 제단을 보수하고, 이전의 제단자리는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약 50m 지점에 있으며, 유허비는 약 30m 거리의 마을 앞에 있다.

( 자료 - 2 )

성삼문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노은단은 성삼문 선생을 비롯한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곳이며, 단소는 유허로부터 동북 50m지점에 있다. 숙종 2년(1676) 읍사 이량이 선생의 옛집 근처에다 사당을 세우고 사육신을 같이 모실 것을 소청하자 "녹운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그 후 매년 12월에 제사를 지내 오다가 고종 때 서원이 훼철 되었으며, 1954년 홍성 고적 현창회에서 폐허가 된 단소를 보수하고 홍북면 노은리 노은단에서 해마다 10월 15일 제향을 드리고 있다.

성삼문 유허비   (도 문화재자료 제 164 호 1984.05.17) 

- 성삼문

충문 성삼문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사람이다.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세종 20년(1438)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는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의 제도를 연구해 와서 1446년 10월 9일에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박팽년, 허조 등과 단종복위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고, 세조에게 모진 고문을 받다 능지처사를 당하였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에게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다.


36 임득의 장군 묘   홍성군 서부면 판교리 95   (도 문화재자료 제 340 호 1995.10.07)

조선 중기의 무신인 임득의 장군의 묘이다. 묘소는 홍성군 서부면 판교리 청룡산에 있다. 묘소 앞에는 1917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지산 김복한이 지은 것이다.

- 임득의

조선 중기의 무신인 임득의 장군의 자는 자방, 평택사람으로 부사 임식의 둘째 아들이며 임득인의 동생이다. 조선 선조 29년(1596) 이몽학이 충청도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인접한 임천·정산·청양·대흥 등을 함락하고 홍주성을 침범하자 홍주목사 홍가신을 도와 난을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1604년 청난공신 3등에 기록되고 평성군으로 봉해졌다. 그 뒤 충청수우후를 거쳐 광해군 1년(1609)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37 김복한 묘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 70   (도 문화재자료 제 169 호 1984.05.17)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지산 김복한의 묘소이다. 홍성군 서부면에 묘와 사당이 세워져 있으며, 묘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놓여 있다.

- 김복한 (1860-1924)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지산 김복한은 1892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이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1894년 승정원 승지에 올랐으나 6월 갑오개혁으로 일본의 간섭이 시작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갔다. 8월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이에 이설·이근주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홍주목사 이승우에게 체포되었다. 고종의 특사로 석방된 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문하생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역신들을 참수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감옥에 갇히고, 1910년 유림의 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긴 글을 보냈다가 투옥되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90여 일만에 석방된 뒤 문하생 수가 늘어나 '인지재'라는 강당을 세우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1924년에 세상을 떠났다.


38 이광윤 묘   홍성군 장곡면 옥계리 산 77   (도 기념물 제 17 호 1977.07.04)

고려 문절공 이행의 6대손 이광윤의 묘이다. 홍성군 장곡면 옥계리에 정려문과 묘소가 있으며, 묘소에는 묘비와 상석 등이 세워져 있다.

- 이광윤

( 자료- 1 )

이광윤은 고려 문절공 이행의 6대손으로, 호는 중임이며 명종 2년(1546) 충청남도 청양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인자하고 의리를 존중하며 효로서 부모를 봉양하더니 33세가 되던 해 효행으로 추천을 받아 생원시에 응시하여 문소전참봉이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북쪽으로 쳐들어오자 친척과 친구, 동네의 장정들 300여 명을 모아 청주 작전에 참가하였다. 청주성 탈환작전에서 승려인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성을 포위하고 격전을 벌여 마침내 청주 성을 탈환하였다. 승전의 기세로 금산 지역으로 향했으나 이미 주둔하고 있던 왜적의 습격을 받아 전원이 전사하였다.

( 자료 - 2 )

여주인 이광윤의 자는 중임이요, 고려조의 문절공 이행의 6대손으로 청양군 비봉면 방한리 신기동에서 명종 2년(1546) 을사 12월 7일에 출생하였다. 승장 영규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청주성 탈환작전을 위하여 고군분투를 할 때 이광윤의 창의군과 조중봉의 창의군이 삼면으로 청주성을 포위하고 격전을 벌여 마침내 청주성을 탈환하고 적병에게 치명상을 주는 전과를 거두었다.


39 홍성 지석묘   홍성군 구항면 태봉리 17 외   (도 기념물 제 28 호 1982.08.03)

( 자료 - 1 )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홍성군 구항면·은하면에 분포하고 있는 이 고인돌은 탁자식으로 모두 4기이다. 구항면 태봉리에 있는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 중 1개가 빠져 나간 상태이고, 나머지 3개는 약간 무너졌으나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그 위에 올려놓은 덮개돌은 길이 3.8m, 너비 3m이다. 이 고인돌로부터 약 7-8m의 거리 남쪽에 또 하나의 넓고 큰 바위가 있었는데 10여년전에 깨뜨려 없앴으며, 당시 돌도끼 1개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 외 구항면 금국리 1기, 은하면 학산리에 2기의 고인돌이 있다.

( 자료 - 2 )

석기시대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거대한 암벽을 올려놓은 탁자식 고인돌의 하나로서 북방식 지석묘이며 구전에 의하면 3,000-5,000년전 이지방 추장급의 묘로 추정되고 있으며 구항면 태봉리와 은하면 학산리에 2개소, 은하면 금국리에 위치하고 있다.


40 용대기   홍성군  결성면 형산리   (도 민속자료 제 4 호 1974.08.31)

용대기놀이에 사용되는 기(旗)로, 용대기 놀이는 이 지방의 순수한 농부놀이다. 조선 순조 때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의 호서속편에 용대기와 농악이야기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200-300년 이상 오래된 놀이로 추정된다. 다행히 형산리 마을에서는 순조 24년(1824) 즈음에 만든 용대기가 보관되어 있고, 그 놀이 역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농사철이 되면 '용대기배미'라 하여 들판 한 가운데에 용대기를 꽂고, 농악장단에 맞춰 흥겹게 일을 하면서 춤과 노래로 피로를 푸는 용대기놀이가 행해지고 있다. 1981년에 개최되었던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민속놀이부문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의 협동 아래 이루어져 지금까지 전수되고 있는 민속놀이로서 그 의미가 있다.


41 양곡사   홍성군 서부면 양곡리

양곡사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남당 한원진(1682-1751)선생의 사우이다. 그의 21주기를 맞아 호서지방의 유생들이 발의하여 1773년에 창건하였는데 퇴락한 것을 최근에 고쳐지었다.


42 원홍주 육군상무사 유품(4)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41 (중요민속자료 제 30-4 호 1992.07.24)

충청도 서해안 연변에 인접되어 있는 홍주·광천·보령·청양·대흥·결성 등 6군을 중심으로 하나의 상권을 결성한 상무우사의 유품이다. 여기에 소장된 청금록에 의하면 1851년 대흥의 임인손이 처음 접장에 선출되었는데 당시는 광천을 제외한 5읍에 임방을 개설했다가 1901년 접장 최덕주가 6군상무우사로 개편, 1907년부터 보령이 따로 운영하다가 1915년에 다시 합병하여 6군상무사가 되었다.


43 연산 서씨 석보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 산 112   (도 문화재자료 제 354 호 1997.08.05)

홍성의 연산 서씨 족보를 돌에 새긴 특이한 유물이다. 족보라는 것은 한 집안의 세계를 기록하여 가문의 형통과 맥을 후대에 책으로 만들어 보존하여 전해지는 것이 보통인데 연산 서씨는 특이하게 136년 전에 8매의 4각 오석 (검은 빛이 나는 단단한 돌)에 족보를 새겨 보존하고 있다. 크기는 가로 25cm, 세로 36cm이며, 두께는 3cm정도이다.


44 최영 장군 사당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 고려 명장 최영 장군이 출생한 영지 ) 

홍북면 노은리는 고려 공민왕 때 최영 장군이 1316년에 출생한 영지이다. 노은리 삼봉 산정에 있던 무민공의 사우는 어느 때 철거 되었는지 기록이 없고 1995년 말 삼봉산정에 사당을 재건축하였다. 최영은 어려서부터 기상이 영민하고 남다른 용맹과 지모가 있어 문무를 겸비한 비범한 인물이었다. 공민왕 이후 각종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뛰어난 장군이자 고려정권의 핵심에 있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실각하고 죽음을 당한다. 홍성군에서는 1995년 문화제 행사시 제 1회 최영 장군 영신제를 갖고 1996년 이후에도 영신제를 올려 최영 장군의 넋을 달래고 있다.


45 동문동 당간지주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97   (보물 제 538 호 1971.07.07)  

( 자료 - 1 )

절에서는 불교의식이 있을 때 사찰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다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시 고려시대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홍성읍내의 경작지 한가운데에 78cm 간격을 두고 마주 서있다. 이 일대는 고려시대의 광경사 터로 알려져 있고 석탑 및 석불좌상 등이 함께 전하고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위로 오를수록 가늘어지고 윗 쪽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이 파여 있으며 가운데 깃대는 남아있지 않다. 기둥의 바깥 면에는 세로줄 문양이 새겨져 있고 기둥머리 부분은 둥글게 처리되었다. 두 지주 사이에는 낮은 대(臺)가 놓여있는데 중앙에 둥근 구멍 하나가 뚫려있어 깃대를 세우던 자리임을 알게 한다. 높이가 4.8m 이고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는 이 당간지주는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자료 - 2 )

이 당간지주는 홍성읍내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는 월계천이 남문천과 합류되는 지점인 홍성읍 대교리 제방 길 밑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일대를 광경사지라고 부르며, 광경사지의 남쪽에 원형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78cm의 간격을 두고 양지주가 동서로 상대하여 서 있는데 지주의 내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고, 바깥면의 중앙부에는 단면 반원형의 2조 돌대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정면과 후면에는 주연에 종대를 돌출시켰고 지주의 상단은 호형을 이루고 마주보는 안쪽의 상단에만 장방형의 간구를 만들었다. 간대는 1매의 장대석으로 중앙에 원좌가 있고 중심에 지름 32cm, 깊이 4cm의 간공이 있는데 이 자리에 당간을 놓게 되어 있다. 현재 당간지주가 위치하고 있는 주변 일대가 고려시대의 절터인데 여기에서 반출된 유물로는 홍성여중 정원에 광경사지 삼층석탑이 있고 홍성읍 내법리에 위치한 용주사에 석불좌상이 있는데 이들은 광경사지 당간지주와 같은 시대의 것으로, 광경사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유물들이다.

( 자료 - 3 )

이 당간지주는 높이 4.44m의 화강석재 2개의 기둥으로 된 사찰당간 지주로서 고려양식의 수법으로 된 12-13세기경 제작되었으며, 그 수법이 수려하여 현재 남아있는 석 당간으로서는 나주동문 밖 석당간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주변의 지면이 깎여나가서 기단이 없어졌고 주각만이 노출되어있으며 주간에 간대가 있고 간대 중앙에는 간주를 받는 직경 약32cm의 둥근 구멍이 있으며 지주는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본당간이 소재했던 광경사는 큰절이었다고 하나 규모 및 창건과 폐사연대는 알 수 없으며 광경사지 삼층석탑, 석불입상, 석불좌상과 함께 현존하고 있다. 당간은 만든 재료에 따라 철 당간, 석 당간, 목 당간으로 불리며 신라 때부터 석당간이 남아있어 두 개의 기둥가운데 깃대(당간)를 세우도록 만든 것으로 사찰에서 당 이란 깃발을 달아 세우던 것인데 큰 행사 때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