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김좌진장군 기년관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백야 김좌진장군 생가에 자리한 기념관으로,
1991년부터 김좌진 장군의 생가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백야의 구국 투쟁의 생생한 기록과 유품이 함께 전시되어있다
호는 백야(白冶)이고 충청 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출신인 김좌진 장군은.
진취적 사상이 뚜렷하여 15세 때에 집안의 종들을 해방시키고, 농지를 소작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1905년(광무 9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 무관 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에 뜻을 두고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 학교를 세우고,
대한 협회 홍성 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 계몽 운동을 하였다.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 등과 함께 서북 학회를 조직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간 복역하였고,
1916년 노백린·신현대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 독립 선언서에
민족 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중국 동북 지방으로 가서 북로 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이 되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 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에는 청산리 계곡에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 이범석 등과 함께 격전을 전개하여 크게 이겼다.
이를 청산리 대첩라 하여 봉오동 전투와 함께 독립 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1929년 한족 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간, 문화 계몽 사업, 독립 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산시역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 공산 청년회의 김일성(金一星)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