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 이무기
홍주성 본문
충남 홍성군에 있는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가 533보 2척이고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문종 1년(1451)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아문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며 ‘홍주아문’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충청남도 서북부에 자리한 홍성군의 해안선에 연접한 서해의 관문이요, 도성(都城)의 인후(咽喉)로, 예부터 국방의 요새일 뿐 아니라, 태안반도에 있는 안흥항(安興港)의 해로를 통하여 멀리 중국을 왕래하던 요지로, 서부 일대의 교통중심지이다.
백제가 웅주(熊州)와 부여에 정도하였을 때는 물론이고, 신라, 고려 및 조선에 이르는 동안 홍주성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산성들이 있었고, 인접한 해미에 지각성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처음 홍주성곽을 쌓은 기록은 없고, 다만 최초로 성의 주위가 1,300척의 토성으로 성첩이 400에 불과하였다는 기록만 존재하며. 기록에 의하면, 고려 때에는 백월산 중복에 해풍현 고을이 있었는데, 현재의 위치로 고을을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에 성을 축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뿐이다.
그후, 순조(純祖:1800~1834)때에 한계수가 수성하였다는데, 그 당시 홍주목사였던 이헌규와 영장 김계묵이 방백들과 의논하고 순조 23년(1822) 8월에 성을 2,350척으로 확장ㆍ보수하였다.
고종 7년 경오(庚午, 1870)에 홍주목사 한응필이 연봉금 3천냥, 원납금 및 지세부과금을 합쳐, 석성으로 개축하기 위하여, 남포에서 30명, 보령에서 20명, 온양에서 15명, 서산, 태안, 해미, 결성, 덕산, 청양, 비인 등지에서 각각 석공 10명씩을 동원하여 기존 1,830척에 560척을 증보하여 석축하는 동시에 650개의 첩(堞), 130개의 치(雉), 2개의 곡성, 천(泉) 4개소, 지(池)등을 설치했다.
동서에 수문을 두어, 서문천의 물을 끌어, 서편 수문에서 동편 수문을 걸쳐 금마천으로 흘러가게 하고, 동서북 세 곳에 문을 다시 세원사. 남문은 홍예문으로 세웠고 경오(庚午, 1870)년 2월27일 준공한 다음 조정에 보고하였다.
동년 10월 15일에 대원군이 휘호한 문액(門額)을 받았는데, 동문은 조양문(朝陽門), 서문은 경의문(景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 이라고 각각 명명하였다. 그런데, 남문은 문루(門樓)가 없고, 그 외에는 모두 문루가 있으며 조양문의 문비(門扉)는 철판이었고, 서북 남문의 문비는 판목(板木)이었다.
축조연대와 보수가 시대별로 달랐던 모양이다.
여기서 90도로 꺾이며 남문으로 향한다.
군청옆으로 도로가나있어 성곽이 끊겨있다.
안쪽으로는 홍성군청이 자리잡고있었다.
초등학교끝이 서문이다.
서문도 흔적이없다.
홍주성은 여기서 끝인데,서문부터 북문, 그리고 동문근처는 복원이 안된상태다.
서울--> 서해안고속도로 --> 홍성IC --> 홍성
서울--> 천안(경부고속도로)--> 홍성(국도 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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