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 이무기
새엄마와 내복 세벌.. 본문
내가 열두 살이 되던 이른 봄, 엄마는 오빠와 나를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당시 중학생인 오빠와 국민(초등)학교 5학년인 나를 아빠에게 부탁한다며 눈물짓던 마지막 길…
내게 남겨진 건 엄마에 대한 추억과 사진 한 장. 엄마는 사진 속에서 늘 같은 표정으로 웃고 계셨다.
아빠는 그렇게 엄마의 몫까지 채워가며 우리 남매를 길러야만 했다.
그게 힘겨워서 였을까?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여름. 아빠는 새엄마를 집으로 데려오셨다.
엄마라고 부르라는 아빠의 말씀에 우리 남매는 따르지 않았다.
결국 생전처음 겪어보는 아빠의 매타작이 시작되었고,
오빠는 어색하게 "엄마"라고 겨우 목소리를 냈지만,
난 끝까지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니 부를 수 없었다.
왠지 엄마라고 부르는 순간 돌아가신 진짜엄마는 영영 우리들 곁을
떠나 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종아리가 회초리 자국으로 피멍이 들수록 난 입을 앙다물었다.
새엄마의 말림으로 인해 매타작은 끝이 났지만, 내 가슴엔 어느새 새엄마에 대한 적개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새엄마를 내가 더 미워하게 되는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다.
내방에 있던 엄마 사진을 아빠가 버린다고 가져가 버린 것 이다.
엄마 사진 때문에 내가 새엄마를 더 받아들이지 않는 거라는 이유에서 였다.
이때부터 새엄마에 대한 나의 반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 새엄마는 착하신 분이었다.
그러나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나의 적개심은 그 착함마저도 위선으로 보일만큼 강렬했다.
난 언제나 새엄마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해 가을소풍날이었다. 학교근처 계곡으로 소풍을 간 나는 도시락을 싸가지 않았다.
소풍이라고 집안 식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고 모두들 점심을 먹을 때
계곡 아래쪽을 혼자 서성이고 있는 내 눈에 저만치 새엄마가 들어왔다. 손에는 김밥도시락이 들려있었다.
뒤늦게 이웃집 정미 엄마한테서 소풍이라고 전해 듣고 도시락을 싸오신 모양이었다.
난 도시락을 건네받아 새엄마가 보는 앞에서 계곡물에 쏟아버렸다.
뒤돌아 뛰어가다 돌아보니 새엄마는 손수건을 눈 아래 갖다 대고 있었다.
얼핏 눈에는 물기가 반짝였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증오와 미움 속에 중학시절을 보내고 3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고입 진학상담을 해야 했다.
아빠와 새엄마는 담임선생님의 말씀대로 가까운 인근의 인문고 진학을 원하셨지만,
난 산업체 학교를 고집하였다. 새엄마가 원하는 대로 하기 싫었고,
하루라도 빨리 집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집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결국, 내 고집대로 산업체 학교에 원서를 냈고 12월이 끝나갈 무렵
경기도에 있는 그 산업체로 취업을 나가기로 결정됐다.
드디어 그날이 오고 , 가방을 꾸리는데 새엄마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난 다시 한 번, 정말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나는 경기도에 도착해서도 보름이 넘도록 집에 연락한번 하지 않았다.
나의 산업체 공장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낯설음이 조금씩 익숙해져갈 무렵
옷가방을 정리하는데, 트렁크 가방 맨 아래 검은 비닐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누군가 내 가방 속에 넣어놓은 비닐봉투. 봉투 속에는 양말과 속옷 두벌 ,
그리고 핑크빛 내복 한 벌이 들어있었다. 편지도 있었다. 가지런한 글씨체… 새엄마였다.
두 번을 접은 편지지 안에는 놀랍게도 아빠가 가져간 엄마사진이 들어있었다.
새엄마는 아빠 몰래 엄마사진을 간직했다가 편지지속에 넣어서 내게 준 것이다.
이제껏 독하게도 참았던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눈물 콧물 뒤범벅이 되며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동안 쌓였던 감정의 앙금이 눈물에 씻겨 내렸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그날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첫 월급을 타고 일요일이 되자 난 홍천행 버스를 탔다.
밤새 눈이 많이 내려 들판에 쌓여 있었다.
내 손엔 세벌의 내복이 들려 있었다.
아빠, 엄마 그리고 새엄마의 내복. 새엄마…
아니 나의 엄마는 동구 밖에 나와 날 기다리고 계셨다.
빗자루가 손에 들린 엄마 뒤에는 훤하게 아주 훤하게쓸린 눈길이 있었다.
"새엄마… 그동안 속 많이 상하셨죠?
이제부턴 이 내복처럼 따뜻하게 제가 엄마로 모실게요."
아직도 말로 못하고 속말만 웅얼거리는 나를,
어느새 엄마의 따뜻한 두 팔이 감싸 안고 있었다.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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