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 이무기

韓國人 첫 博士學位 본문

자료모음/잡동사니

韓國人 첫 博士學位

천수만이무기 2012. 12. 25. 10:29

 

 

 

  韓國人 첫 博士學位

 

이승만 초대대통령(李承晩 初代大統領)이 미국(美國) 프린스턴大에서
박사학위(博士學位)를 받을 때의 모습.

 

학위(學位)의 주인공(主人公)은 李承晩(1875∼1965) 초대대통령(初代大統領).

국제법(國際法)과 외교사(外交史)를 주제(主題)로 한 박사학위(博士學位) 논문(論文)이 1910年 6月 14日 미국(美國) 프린스턴대(大)

이사회(理事會) 를 통과(通過)했다. 그 해 7月 18日 졸업식(卒業式)에서 나중에 미국(美國)의 제28대 대통령(第28代 大統領)이 되는

윌슨 총장(總長)으로부터 박사학위(博士學位) 증서(證書)를 받았다. 李承晩의 나이 35歲 때 일이다. 당시(當時)로 보면 매우 늦은 나이였다.

미국 유학(美國 留學) 전(前) 그는 20대 중.후반 시절(20代 中·後半 時節)을 한성감옥(漢城監獄)에서 보냈다.

 

29歲 때 출옥(出獄) 직후(直後) 도미(渡美), 
5年 만에 조지워싱턴대(大) 학사(學士)-하버드대(大) 석사(碩士)-프린스턴대(大) 박사학위(博士學位)를 모두 따내는 기적(奇蹟) 같은

일을 해낸다. 이후(以後)는 독립운동(獨立運動)의 길을 걸었다. 이 같은 그의 청년(靑年) 시절(時節)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에게 늘 따라다니는 "독재자(獨栽者) 李承晩"이란 꼬리표에 그밖의 모든 일은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1948年대한민국(大韓民國) 초대 대통령(初代 大統領)이 되는 영광(榮光)을 누렸지만, 4·19 혁명(革命)으로 하야(下野)하는 불명예

(不名譽)를 안았다. 1970∼80年代 그에 대(對)한 평가(評價)는 주(主)로 불명예(不名譽) 부분(部分)에 초점(焦點)이 맞춰졌다.

90年代 후반(後半)부터 ‘李承晩 다시보기’가 전개(展開)됐다. 대한민국(大韓民國) 뿌리 찾기의 일환(一環)이었다.

 

그를 통(通)해 건국대통령(建國大統領)으로서 그의 업적(業蹟)은 상당부분(相當部分) 재조명(再照明)됐다.

요즘은 청년시절(靑年時節)과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대(對)한 재평가(再評價)로 관심(關心)이 확장(擴張)되고 있다.

박사학위(博士學位) 취득 100주년(周年)을 맞아 잊혀진 그의 청년시절(靑年時節)을 감옥(監獄), 영어공부(英語工夫), 유학(留學),

독립외교(獨立外交) 등(等) 4個의 키워드로 되돌아 봤다.

그가 미국(美國)에서 단기간(短期間)에 학사(學士)-석사(碩士)-박사(博士)를 마친 배경(背景)에 초점(焦點)을 맞췄다.

 

‘이승만 재조명운동(李承晩 再照明運動)’을 주도(主導)해 온 유영익 한동대(韓東大) T H Elema 석좌교수(碩座敎授) 전 연세대석좌교수

(前 延世大碩座敎授)의 도움을 받았다.

 

1. 감옥(監獄)


李承晩은 24歲 때인 1899年 1月부터 1904年 8月까지 만 5년 7個月을 한성감옥(漢城監獄)에서 보냈다.

고종황제(高宗皇帝)를 폐위(廢位)시키고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도입(導入)하려는 쿠데타 음모(陰謀)에 가담(加擔)한 혐의(嫌疑)로

체포(逮捕)· 투옥(投獄)됐다. 당초(當初) 사형(死刑)이 예고(豫告)됐으나 결국(結局) 종신징역형(終身懲役刑)을 선고(宣告) 받았다.

그가 기독교(基督敎)를 받아들인 것은 감옥(監獄)에서 사형(死刑)을 예감(豫感)하면서였다. 감옥(監獄)은 그에게 하나의 大學이었다.

 

그가 5年 만에 美國에서 學士-碩士-博士를 마칠 수 있었던 배경(背景)엔 감옥(監獄)에서의 공부(工夫)가 있었다.

『만국공법(萬國公法)』(원제(原題)『Handbook of International Law』, 중국번역본(中國語飜譯本)『만국공법요약(萬國公法要約)』과,

『청일전기(淸日戰紀)』(중국원제(中國語原題)『청일전쟁본말(淸日戰爭本末)) 두 권(卷)을 번역(飜譯)했다.

 

또 『Corea: the Hermit Nation』이란 영어 원서(英語 原書)를 바탕으로 해서 『독립정신(獨立精神)』이란 책(冊)을 저술(著述)했다.

모두 국제법(國際法)과 외교사관련 책(外交史關聯 冊)들이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익힌데다 탁월(卓越)한 영어 실력(英語 實力)을

갖췄기에 가능(可能)했다.

 

미국선교사(美國宣敎師)들이 감옥(監獄)에 넣어준 책(冊)을 가지고 공부(工夫)하며 이미 상당수준(相當水準)의 학식(學識)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감옥(監獄)에서 영어서적.잡지(英語書籍·雜誌)를 통(通)해 얻은 새로운 정보(情報)를 "제국신문(帝國新聞)"

등(等)에 기고(寄稿)하기도 했다. 미국(美國)의 교육과정(敎育過程)을 개괄소개(槪括紹介)한 논문(論文) ‘미국(美國)의 교육제도

(敎育制度)’(중국어번역본(中國語飜譯本)) 같은 경우(境遇) 붓글씨로 일일이 필사(筆寫)하기도 했다.

 

 

2. 영어공부(英語工夫)


李承晩은 배재학당 영어학부(培材學堂 英語學部)에서 영어(英語)를 전공(專功)했고, 문명(文明)을 접(接)했다.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1학기(學期)를 마친 후(後)엔 ‘영어조교(英語助敎)’로 특채(特採)됐다. 영어(英語)를 가르치며 배운 셈이다. 그만큼 학습(習得)이 빨랐다.

 배재학당 졸업식(培材學堂 卒業式)에서 한국 역사상(韓國 歷史上) 처음으로 영어 연설(英語 演說)을 한 인물(人物)이기도 하다.

감옥(監獄)에서도 영어 공부(英語 工夫)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어사전(英韓辭典)"을 만들 정도(程度)였다.

 

러·일전쟁(日戰爭)이 한창인 1904년말(年末), 민영환(閔泳煥)·한규설(韓圭卨)이 그를 밀사(密使)로 발탁(拔擢), 미국(美國)에 보낸

배경(背景)에는 무엇보다 탁월(卓越)한 영어 실력(英語 實力)과 감옥(監獄)에서 익힌 국제정치지식(國際政治知識)이 있었다.

그의 하버드대(大) 시절(時節 노트가 전(傳)해진다. 이를 유영익 교수(敎授)가 하버드대(大) 교수(敎授)에게 보여주자 “동양인(東洋人)이

잘 틀리는 정관사(定冠詞), 부정관사(不定冠詞) 등(等)도 대부분(大部分) 맞는, 거의 완벽(完壁)한 영어(英語)”라고 평가(評價)했다고 한다.

 


 

 

 하버드대(大) 석사과정 재학시절(碩士課程 在學時節)의 李承晩(뒷줄 맨왼쪽)과 그의 급우(級友)들. 

가운데 앉은 인물(人物)은 브라운대(大)에서 초빙(招聘)된 국제법담당(國際法擔當) 객원교수(客員敎授) 윌슨(M M Wilson),

후일(後日) 미국28대 대통령.

 

3. 유학(留學)


1904년말(年末) 李承晩은 밀사(密使)로 미국(美國)을 방문(訪問)한다. 한반도(韓半島)에선 러·일(日) 전쟁(戰爭)이 한창일 때였다.

러·일(日) 전쟁 이후(戰爭 以後) 한반도(韓半島)의 독립적 지위(獨立的 地位)를 유지(維持)하기 위(爲)해 미국(美國)의 거중조정

(居中調停)을 요청(要請)하기 위(爲)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국제정세(當時 國際情勢)는 우리에게 유리(有利)하지 않았다.  
미국(美國)은 일본(日本)과 별도(別途)로 태프트-카스라 밀약(密約)을 준비(準備)하고 있었다. 일본(日本)의 ‘한국보호국화

(韓國保護國化)’를 허용(許容)했다.

 

밀사행(密使行)이 실패(失敗)한 후(後) 그는 귀국(歸國)을 포기(抛棄)하고 유학(留學)을 택(擇)한다.

아버지의 유학권유(留學勸誘)도 있었다. 그 역시 만일(萬一)을 대비(對備)해 한국(韓國)을 떠날 때 미국선교사(美國 宣敎師)들이

써준 19통(通)의 추천장(推薦狀)을 가지고 갔다. 미국(美國)의 어느 대학(大學)이 좋은 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조지워싱턴대(大)를

3학년(學年)에 편입(編入)한 것은‘배재대학 (培材大學)’2년(年) 학력(學力)을 인정(認定)받았기 때문이다.

 

이후(以後) 하버드대(大) 석사(碩士) 1년(年), 프린스턴대(大) 박사(博士) 2년(年) 과정(課程)을 일사천리(一瀉千里)로 마쳤다.

프린스턴대(大)에서 그가 주(主)로 수강(受講)한 과목(課目)은 국제법(國際法)·외교학(外交學)·철학사(哲學史) 등(等)이었다.

5년간(年間) 장학금(奬學金)으로 다녔다.

 

李承晩의 박사논문제목(博士論文題目)은 ‘미국(美國)의 영향(影響)을 받은 (국제법상(國際法上)) 중립(中立)’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다. 심사위원(審査委員) 3명(名)으로부터 높은 평점(評點)을 받았고,

졸업후(卒業後) 1912년年 1月 프린스턴 출판부(出版部)에서 책(冊)으로 출간(出刊)됐다.

 

미국(美國)의 대학출판부(大學出版部)에서 책(冊)이 나온다는 것은 논문(論文)이 상당(相當)한 수준(水準)에 도달(到達)했음을

의미(意味)한다. 유 교수(敎授)는“그의 논문(論文)은 전시(戰時)에 중립구(中立國) 선박이(船舶)이 전쟁지역(戰爭 地域)에 드나들며

통상(通商)을 자유(自由)롭게 할 수 있는 권리(權利)를 국제법상(國際法上)으로 보장(保障)하는 데 있어 미국(美國)이 끼친 영향(影響)에

관(關)한 것” 이라며 “미국 역사(美國 歷史)에 관심(關心)이 많았던 李承晩이 신생공화국(新生共和國) 미국(美國)이 국제법(國際法)

발달(發達)에 기여(寄與)한 점(點)을 살펴본 것”이라고 설명(說明)했다.

 

 

4. 독립외교(獨立外交)

 

헤이그 특사(特使) 이상설(李相卨)이 1908年 8월초(月初)에 뉴욕을 떠나기에 앞서 李承晩에게 보낸 편지(便)紙).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은 외교(外交)를 중시(重視)하는 것이었다. 국제정치(國際政治) 전문가(專問家)인 그의 독립외교(獨立外交)

노선은(路線)은 어떤 성과(成果)가 있었는가. 이 부분(部分)도 지금까지 저평가(低評價)돼 왔다.


중국(中國)의 임시정부(臨時政府)와 만주(滿州)의 무장투쟁(武裝鬪爭)이 주(主)로 평가(評價) 받았다.  의혈활동(義血活動)과

무장투쟁(武裝鬪爭)이 있었기에 외교노선(外交路線)도 빛을 발(發)하는 것이 겠지만, 외교(外交)가 없이 한국(韓國)의 독립(獨立)이

가능(可能)했을까. 요즘 새롭게 주목(注目) 받는 부분(部分)이 이 대목(臺目)이다. 특(特)히 1943年의 ‘카이로 선언(宣言)’이 그러하다.
 

미국(美國)·영국(英國)·중국(中國)의 수뇌(首腦)가 처음으로 항국(韓國)의 독립(獨立)을 공약(公約)했다. 카이로 선언(宣言)에서

한국 (韓國)의 독립(獨立)을 특별(特別)히 명시(明示)해 놓은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당시(當時) 일본(日本)의 식민지가(植民地)가 한 둘이 아닌데 왜 유독(唯獨) 한국(韓國)만 명시(明示)했는가. 그동안 중국(中國)의

장개석총통(蔣介石總統)이 주창(主唱)해서 가능 (可能)했던 것으로알려져 왔으나, 최근(最近) 그렇지 않다는 주장(主張)이 제기(提起)

되고 있다.

 

올해 3月 출간(出刊)된『카이로 선언(宣言):대한민국 독립(大韓民國 獨立)의 문(門)』의 저자(著者) 정일화 박사(博士)는 미국(美國)

 루스벨트 대통령(大統領)과 그의 특별보좌관(特別補佐官) 해리 홉킨스가 주창(主唱)했다고 주장(主張)했다. 루스벨트의 심복(心腹)

이었던 홉킨스가 카이로 선언(宣言)의 초안(草案)을 작성(作成)했고, 이를 루스벨트와 처칠이 약간(若干)의 수정(修正)을 한 후(後)

완성(完成)됐다는 것이다.


유영익 교수(敎授)는“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그들이 알아서 한국독립조항(韓國獨立條項)을 특별(特別)히 넣었을 리는 없다.

아직 뚜렷한 증거(證據)는 없는 상태(狀態)다. 카이로 선언(宣言)과 李承晩의 독립외교(獨立外交)의 관계(關係)를 밝히는 일이

앞으로의 "연구과제(硏究課題)"라고 말했다.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