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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같은 할아버지...

천수만이무기 2014. 1. 30. 14:21

 

 

 

 

 

대학 1학년 때, 교문앞에는 허술한 라면집이 하나 있었다. 주인은 노부부였다.
통나무를 툭툭쳐서 이어붙인 간판에는 하얀 페인트로 <캐빈>이라고 써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 할아버지를 캐빈할아버지라고 불렀었다.
할머니는 주방에서 열심히 라면을 끓이시고 할아버지는 하얀 행주치마를 두르셨는데

베레모를 멋드러지게 비껴 쓰셨다. 늘 웃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라면집에 들어가 본일이 없었다.
-한번 가 봐! 맛있어...할아버지가 얼마나 친절하시다고...

친구들은 그렇게 말을 했지만 나는 단돈 오백원이라도 헤프게 쓸 수는 없었다.
꼬깃꼬깃 접어 모았다가 학비에 충당하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구두쇠!    노랭이!

그런 호칭에 달관한 지는 벌써 오래된 일이었다.
어머니가 많이 편찮았기 때문이었다.미처 내 학비까지 조달할 수 없는
가정형편 때문에 나는 별별 아르바이트를 다 했었다.

식당에서 접시도 닦고,신문도 돌리고,밤으로는 호떡을 구워 팔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떡리어커를 끌고 나갔다가 소나기가 줄기차게 내리는 바람에
그냥 돌아오던 날의 밤이었다.

-학상,학상 이리좀 와 봐!


할아버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리어커를 한쪽으로 대고 가게에 들어가니 라면을 한 대접 주신다.
(전..라면을 안먹는데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돈을 주고 라면을 사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게도 호떡이 있었고 숙소에 돌아가면 밥도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괜찮아,뜨거울 때 후루룩 마셔! 그러면 기운이 날거야.
이런 억센 비를 맞고 다니면 큰 탈이 나는 벱여.어른 말은 들어,어서!

하시며 재촉하셨다.

망서리다가  라면을 뚝딱 먹었다.시장했었던 것 같았다.
신세지는 것이 싫었던 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그만 둬!


할아버지가 내 친구이름을 대면서 짐짓 역정을 내셨다.

-종호학상 친구지?

-녜?

할아버지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빙그레 웃으시며

다음에 돈을 많이 벌면 그 때 라면값을 내라고 했다.

비는 계속 쏟아졌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할아버지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셨다.

 

-내가 종호학상한테 자네 얘기를 들었지.그렇게 고생을 많이 한다매?
매일 이 앞을 지나가는 자네 모습을 눈여겨 보았는데..우리 아들 같애...
나도 자네같은 아들이 있었어...참 착한 애였지. 효자였어!

할아버지의 외아들이 법대 4학년이었는데 그만 친구들과 놀러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한없는 인생의 무상과 허탈함이 소용돌이 쳤지만
그런 마음 역시 살다보니 보잘 것 없는 감상이었다는 아리송한 얘기였다.

그 때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었고
내 스스로 고생을 한다거나 힘이 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조금 짜증나기도 했었다.

 

또한 (누구나 환경이 그렇다면 무슨 일이든 다하는 것 아닐까?
가급적 신세는 지지 말아야지)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야,임마! 너 캐빈에 갔었다매?

평소 캐빈에 갈 시간이 없다고 버텼던 나를 비웃듯이 친구 종호가  킥킥대며 말을 붙여왔다.

-할아버지가 너같은 놈 처음 봤다카더라.
세상은 서로 신세지기도 하고 서로 베풀기도 하며 살아가야
세상사는 재미가 있는 벱이라고  꼭 전하라더라.

 

그래서 그랬다기보다는 그 이후로 가끔 캐빈에 들려서 라면도 먹고.이런 저런 얘기도 들었었다.
라면집 캐빈의  특징은 이러했다. 카운터에는 구태어 돈받는 사람이 없었다.

수북히 잔돈만 채워놓고는 손님들이-손님이라야 대부분 학생이었다-
스스로 알아서 계산을 하기도 하고 스스로 알아서 거스름을 거슬러가기도 했다.

-손님이 라면을 먹고 그냥가면 어떻게 해요?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하얗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할 수 없지,뭐! 오죽하면 그냥가겠나....
그래도 여직 장사를 하면서 밑진 적은 없어!
밑지다니...한 15년을 이곳에서 장사를 했는데...
언젠가는 불쑥 중년의 아줌마가 어린  꼬마를 데리고 들어와서는
<여기가 엄마 처녀시절에 라면을 먹던 곳이다>하며 
자랑스럽게 같이 라면을 시켜 먹기도 한걸...
바로 저 탁자야!

할아버지가 가르키는 곳에는 아주 오래 된 듯한 나무 탁자가 두개 있었다.
-처음 라면가게를 냈을 때 쓰던 두개의 탁자지. 지금은 몇 갠가...?
여나무개는 될걸. 어떨 때는 불쑥 말쑥한 신사분이 찾아와서는 (영감님, 죄송합니다.
옛날에 제가 철이 없어 번번히 라면을 먹고는 몰래 나갔거든요) 하며
(이제사 철이 들어 그 외상값을 갚으러 왔다)며 돈을 내놓기도 하지...

하하하!
그게 다 인생을 사는 재미지...자네도 그것을 빨리 깨달아야 해!
착하기만 하다는 건 자랑이 아니야, 성실하다고하는 것이 다 자랑은 아니야...
사람은 모두 어우러져 울고 웃으며 살아야 하는 벱여!
그래서 저 나무탁자 두개는 아무리 낡아도 없애지 않는거야.
또 누가 아남?  어떤 추억을 가진 분이 와서 저 탁자에 앉게 될 지....

 

기가 막힌 철학이었다.
그 인생철학이 곧장 내 호떡가게에도 적용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 간이 포장마차 호떡집은 인근 학생들에 의해 금방 유명해졌다.

더 달라면 더주는 집으로, 없으면 돈을 안내는 집으로...
뜻밖에 호떡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기가막힌 마켓팅전략이기도 했다.

 

비로소 밝히지만 나는 덕분에 무사히 대학을 마칠 수 있었고 졸업을 무사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익명의 독지가>가 준 장학금이었다는 것이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을... 
아마 익명의 독지가는 캐빈할아버지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할아버지는 극구 부인을 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 라면집 캐빈의 벽에 써있던 몇장의 글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앉았던 자리의 흔적은 늘 아름답다.
-내일은 주님의 것. 나는 오늘을 소중히 한다.
-주님이 지배하시는 세상 일을 걱정하지 말라.
     안되는 일은 안되는 일이니 괜한 걱정을 하지말고
     되는 일은 되는 일이니 미리 걱정을 하지말라.
-주님주신 재능을 자랑하지말라.

재능을 고이 접어 후배에게 전하라.

 

대충 그런 얘기들이었다.장학금을 받을 때 써낸

각서의 내용이 그 작은 벽보의 내용과  비슷했었다.
<받은 것을 소중히 하여 반드시 후배에게 갚는다>라는 내용이었다.

 

나 역시 포장마차 호떡집을 졸업과 동시에
신나는 마음으로 후배에게 물려줬음은 말 할 것 없다.  

 

유감스런 일이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캐빈할아버지와는

왕래가 뜸해졌었는데 지방 발령이 끝나고 반가운 마음으로 다시 학교앞

캐빈을  찾았을 때 학교 앞은 아주 커다란 도로가 생겨나 있었다.

라면집 캐빈이 서있었던 곳은 도로 한복판이 되었고 베레모를 늘 쓰고 계셨던

할아버지의 멋진 모습은 두번 다시 볼 수가  없었다. 길을 가다가 문득문득

할아버지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길 위에 떠 올라 혼자 미소를 짓기도 했다.

마치 깊은 산속의 옹달샘같았던 할아버지셨고...
우리 시대의 진실한 어른이셨음을 후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갔다. 그 소소하지만 아름다웠던 기억은 가뭇가뭇 사라지려고 한다.
그러나 늘 말없이 용기를 주고 격려해주었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나만의 추억이 아닐 것이다.

 

내가 다시 장사를 하게되면

<캐빈>같은 그런 라면집을 낼 것이다.
무슨 일이든 받아주는...
누구든 와서 울거나 웃거나 하는...
무슨 나쁜일을 해도 도닥거려주는...
그래서 속이 하늘처럼 탁 터져서 나갈 수 있는...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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