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 이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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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힐 옛날사진

천수만이무기 2015. 1. 28. 17:08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이 느리지만 조금씩 복구되고 있던 시기에

4.19, 5.16 등 엄청난 정치적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잇따랐다.

미국 정부는 처음에는 5.16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이에 5.16 주역이었던 김종필씨는

미국 정부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여러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주한미군과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위락시설을 갖춘 대규모 호텔 건설'이다.

위락시설을 만들면 주로 일본으로 휴가가는 주한미군이 서울에서 휴가를 보내며 돈을 쓰게 하는 동시에

군사정권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이에 따라 1961년 하반기 대규모 호텔을 조성할 곳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한강변 별장터가 선정됐다.

부지 면적은 19만1천여평. 李대통령은 가끔 이곳에 들러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울창한 아차산을 등진 이곳은 한강의 흐름과 넓은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이었다.


새 호텔에는 '워커힐(Walker Hill)'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주한미군과 유엔군의 휴가 장병을 유치하기 위해 짓는 호텔인 만큼

한국전쟁 중 의정부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다.

호텔과 함께 들어설 빌라의 이름도 더글러스, 매튜, 멕스웰, 라이만, 제임스 등 미군이나 유엔군 장군의 이름을 붙였다.


비밀리에 추진되던 워커힐 건립 계획은 62년 봄 일본의 주간지들이 앞다퉈 "한국의 군사정권이

 미군 장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술과 여자와 도박판 위주의 위락시설을 짓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알려졌다.

미국의 AP.뉴스위크 등도 62년 10월 "이 시설은 매춘굴.카지노.미인 호스티스 등을 갖추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미국 부인단체가 유엔군 사령부와 한국 정부에 강력 항의하기도 했다.

워커힐의 주설계는 김수근씨가 맡았다. 그는 서울대 공대 재학 중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뒤 도쿄(東京)예술대 건축과, 도쿄대 건축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워커힐 설계에는 김수근 외에 김희춘.나상진.엄덕문.이희태.강명구 등 여러 명의 건축가가 참여했다.


63년 4월 워커힐이 문을 열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곳을 자주 찾았다.

그러자 서울시장들은 워커힐 가는 길을 정비하고 도로변에 건설공사를 벌였다.

이는 朴대통령에게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한양대 앞 성동교는 64년부터 2년간 확장공사를 벌였다. 또 뚝섬지구의 토지구획 정리사업이 시작되고,

성동교에서 워커힐에 이르는 광나루길은 폭 10m에 불과했으나 66년에 30m로 넓어졌다.

결국 워커힐은 당초 건립 목적인 많은 미군 장병 유치에는 실패해 적자경영을 면치 못했지만,

서울 동부지역 개발에는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6-70년대 초반의 서울에서 가장 유명했던 특급호텔인 워커힐 호텔 모습.

천호동지역이 서울옆에 붙어 있는 시골동네이던 시절에 한강변 아차산에 지어진

워커힐 호텔은 60년대 지어질 무렵부터 유명한 호텔이었고 70년대 내내 남북회담이

개최되면 북한에서 내려온 인사들이 머물던 곳이었습니다.

 

 

미사리방향이 보이는 워커힐 호텔 모습. 사진상의 3시방향이 윗 사진의 광나루 해수욕장 사진이고
사진에 보이는 흰 백사장도 당시 해수욕장이었습니다.
 

한강이 깨끗해서 수영이 가능했던 시절에는 한강에서도 유명한 해수욕장이 있어서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었습니다.   사진에서도 깨끗한 백사장이 보이는 곳이

바로 광나루 해수욕장이었습니다.



 


 

워커힐로 올라가던 입구의 모습.  한강에 걸쳐져 있는 다리는 당시 천호동 시골로 가던 광진교의

모습입니다.    한강변에는 좋은 모래밭들이 많아서 여름이면 해수욕을 할려고 서울시민들이

많이 몰려 들었지요.   광나루.뚝섬 제1한강교 등은 인기있던 해수욕장이었습니다.


 

 

워커힐이 유명했던 것은 당시 어느 호텔에서도 없던 극장식 버라이어티쇼가 유명했기 때문이죠.

사진에서는 얌전한 복장의 무희들이 춤을 추지만 반나의 옷을 걸친 무희들이 화려한

복장으로 춤을 추던 것으로 유명했던 곳으로 당시 서울 장안에서도 꿋발께나 쓰는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옛날 6-70년대 유명했었던 워커힐 하니바 댄싱팀의 무희 모습.

이 당시 워커힐 쑈는 정말로 유명했었습니다.

국내에서 소위 끗발있는 인사나 외국인들만이 볼 수 있었지요.

워커힐 쇼를 기억하시면 연식이 보통 높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서울에서 일류급 호텔은 거의 다가 수영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워커힐에서 유일하게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있었던 풀장이 바로 워커힐 풀장으로 그 인근 사람들이 다 모여들던 유명한 곳이었습다.

인근에 광나루 해수욕장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워커힐 해수옥장도 메어 터질 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던 당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당시 워커힐 수영장의 신문광고 모습.   당시 워커힐은 서울에서도 거의 변두리라서 노선버스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광화문 시민회관옆에서 출발하는 특별 셔틀버스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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