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 이무기
김좌진장군 생가지 본문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이 살았던 곳이다.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한 후 1917년 만주로 망명하였는데, 이후 13년간 평생을 항일전투에 몸바쳤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는데 이것이 독립 전투상 승리의 금자탑을 세운 일로 기록되는 청산리전투이다.
1929년 정신, 이붕해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주석에 취임하고,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했다.
한편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공산당원의 흉탄에 순절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으며 홍성역 앞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광이 따로 있고 밖에는 마구간이 있다. 안채는 앞면 8칸·옆면 3칸의 기와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왼쪽부터 2칸 부엌이 있고, 아랫방과 윗방 각 한 칸씩 있으며, 통칸의 대청이 있다.
그 위에 방이 한 칸 있고 끝으로 툇마루가 있다. 방 앞으로 툇마루가 있는데 맨 끝방 주위에는 툇마루를 한 칸 높여 누각처럼 만들었다.
마당 한쪽에 우물이 있으며 밖에 있는 마구간은 화장실과 마구를 3칸 집에 만들었다.
생가지는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본채와 문간채,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김좌진장군 사당(백야사)는 '98년~2001년까지 재실,주차장들을 조성하였으며 매년 음력 12월 25일에 제향을 올리 있다.
김좌진 장군 기념관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백야 김좌진장군 생가에 자리한 기념관으로,
1991년부터 김좌진 장군의 생가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백야의 구국 투쟁의 생생한 기록과 유품이 함께 전시되어있다
호는 백야(白冶)이고 충청 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출신인 김좌진 장군은.
진취적 사상이 뚜렷하여 15세 때에 집안의 종들을 해방시키고, 농지를 소작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1905년(광무 9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 무관 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에 뜻을 두고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 학교를 세우고,
대한 협회 홍성 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 계몽 운동을 하였다.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 등과 함께 서북 학회를 조직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간 복역하였고,
1916년 노백린·신현대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 독립 선언서에
민족 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중국 동북 지방으로 가서 북로 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이 되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 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에는 청산리 계곡에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 이범석 등과 함께 격전을 전개하여 크게 이겼다.
이를 청산리 대첩라 하여 봉오동 전투와 함께 독립 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1929년 한족 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간, 문화 계몽 사업, 독립 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산시역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 공산 청년회의 김일성(金一星)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홍성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로 30분 정도 소요
- 승용차 : 홍성읍소재지 → 갈산29호선국도 → 행산리 2km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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