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 이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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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에 반영된 조선후기 사회상

천수만이무기 2009. 11. 17. 16:35

한국 전래동화의 고전 『흥부전』. 어린시절 동화 속에서 『흥부전』을 읽은 사람은 한없이 마음씨 착한 흥부가 형 놀부에게 시달림을 받다가 결국에는 복을 받고, 성격이 고약한 놀부가 박통에서 나온 인물들에게 벌을 받는 대목에서 마냥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부모에게 비슷한 재산을 물려받았을 것 같은데 한 사람은 엄청난 부자고 한 사람은 왜 그렇게 지지리도 가난했던 것일까?


형은 부자, 동생은 가난뱅이가 된 까닭은?


『흥부전』의 주인공 흥부와 놀부는 한 형제이면서도 성격이나 재산, 자식의 숫자 등에서 너무나 차이가 나는 캐릭터이다. 이처럼 형제를 대비시켜 마음씨 착한 사람이 결국에는 큰 복을 받는다는 설정은 전통시대 소설에서 너무나 흔한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도 중요한 사회변동이 반영되어 있다. 핵심 부분을 살펴보자.


‘놀부네 갔던 흥부가 몽둥이로 실컷 맞고 돌아오니. 그것을 본 흥부 마누라, 바깥으로 뛰어나가선 덜컥 주저앉으며 태산같이 쌓인 곡식 누구를 주자고 아껴서 이리 몹씨 때렸을까. 어떤 사람 팔자 좋아 장손으로 태어나서 선영(先塋:죽은 조상) 제사 모신다고 호의호식(好衣好食) 잘 사는데, 누구는 버둥대도 이리 살기 어려울까, 차라리 나가서 콱 죽고 싶소’


흥부 마누라의 넋두리 중 밑줄 친 부분이 흥부와 놀부가 한 형제이면서도 엄청난 경제력의 차이가 나는 기본적인 원인이다. 바로 놀부는 장손으로서 선영의 제사를 모시기 때문에 호위호식하고 잘 산다는 것이다. 아들과 딸 중에 당연히 아들이 우선이요, 아들 중에서도 장자가 그 집안의 종손으로 조상의 제사를 모시므로 최대한 대접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와 이에 따르는 재산상속상의 차별. 이것이 흥부전을 풀어가는 주요한 열쇠가 된다. 질문을 던져보자. 『흥부전』과 같은 소설이 고려시대나 조선전기에는 나타날 수 있는 소재일까? 대답은 ‘아니다’이다. 전통 혼례는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결혼을 해도 남자가 여자 집에서 일정 기간을 살아가는 여성 중심의 입장이 강하였다. ‘장가간다’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종실록』에는 ‘우리나라는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를 가니 사위가 장인 보기를 친아버지처럼 하고 장인도 사위 보기를 친아들처럼 여긴다’고 하여 친가, 외가의 구분이 거의 없었던 시대분위기를 설명하고 있다.

  

조선전기의 족보에는 바로 이러한 사회상이 반영되어 『성화보(成化譜:중국 명나라 연호인 성화 연간인 1476년에 편찬됨)』와 같은 15세기 안동 권씨 족보에는 아들과 딸, 친손, 외손이 족보상에서 출생 순서에 따라 동일하게 수록되었다. 출생에 관계없이 남자를 먼저 쓰고 여자를 뒤에 쓴 조선후기의 족보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서 남녀 차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회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조선중기이후 성리학의 보급과 함께 혼례에도 남성중심의 입장이 반영되어 혼례를 치룬 후에 바로 신부를 신랑집에 데려옴으로써 친정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바로 시댁의 습속에 맞추도록 한 것이다. 기존의 ‘장가간다’는 개념이 ‘시집온다’라는 개념으로의 바뀐 것도 이러한 사회분위기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장자 중심 사회의 대표 격인 놀부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전기까지 재산상속에서도 장남, 차남은 물론이고, 딸까지 차별되지 않았다. 사위가 가계를 잇고 제사를 받드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재산상속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조선전기인 15세기에 완비된 법전 『경국대전』의 재산분배와 상속과 관련한 규정에도 재산상속 때 본처의 소생인 경우 장남에서 혼인한 딸에 이르기까지 모두 똑같이 분급(分級)하도록 하고 있으며, 다만 집안의 가계를 잇는 사람에게만 1/5을 더 주도록 명시하고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나눠주며 작성한 고문서인 「분재기(分財記)」에도 조선전기에는 아들, 딸 구별 없이 똑같이 재산을 분배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는 흥부와 놀부처럼 출생에서부터 이미 엄청난 경제력의 차이가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이후 주자성리학 이념이 강하게 정착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큰 전란을 겪게 되면서 혈연공동체 의식이 보다 강화되었고, 남자 중심, 장자 중심의 가족제도가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제도의 변화는 상속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17세기에 작성된 분재기에 딸의 상속재산은 아들의 1/3로 줄어들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봉양과 제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데 있었다. 흥부의 아내가 넋두리로 말한 조상 제사가 재산 상속의 주요한 기준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족보에서도 아들들이 먼저 기재되었고 딸에 대해서는 사위의 이름만 기재함으로써 그 밑에 기재된 외손들의 이름은 족보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아버지 중심의 혈통만이 강조되었고, 그 중에서도 장자는 대가족 구성원의 대표자로서 우월적 지위를 보장받게 되었다. 놀부는 바로 이러한 조선후기 가족제도의 변화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탄생한 인물이었다. 이 시대에는 이미 잘사는 형과 못사는 동생들이 다수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회상을 풍자와 해학을 담아 이야기로 전하는 과정에서 형의 욕심과 동생의 순박함을 과장되게 대비시킨 것이 『흥부전』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부농을 대표하는 놀부, 빈농을 대표하는 흥부


위에서 지적한 장자상속이라는 가족제도, 상속제도의 변화와 함께 『흥부전』에는 조선후기 사회경제적인 변화상이 아주 사실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17세기 이후 조선사회는 농업생산이 발달하고 상품경제가 확대되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어 나갔다. 흥부가 가난한 농민의 대표라면 놀부는 이러한 사회변동 속에서 급부상한 신흥 부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흥부전』은 부자 놀부, 가난뱅이 흥부를 대비시켜 조선후기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빈부의 차이를 묘사하고 있다. 조선후기 농업생산력의 증가와 이에 따른 상업의 발달 등으로 말미암아 농민 중에서도 부유한 농민이 나타나는가 하면, 자신의 경작지 마저 잃고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빈농층도 대량으로 나타났다. 이앙법(모내기)의 보급과 같은 농업경제의 비약적 발전은 농민들의 노동력을 절감시켜 주었으며, 이에 따라 광범위한 농작지를 경영하는 경영형부농(經營型富農)도 나타났다. 또한 상품유통경제의 성행, 광산의 개발 등은 전체적인 국부(國富)의 증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풍요는 전체 농민들에게 고르게 분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유한 농민의 성장 속에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화전민, 유랑민까지 생겨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흥부는 바로 이러한 빈농으로서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농민들을 대표하기도 한다. 특히 흥부가 부인에게 ‘우리 부부 품이나 팔러 갑시다’라고 한 대목에는 자신의 날품을 팔 수밖에 없는 어려운 농민들의 처지가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런 희망도 없이 절망의 나락으로 빠진 가난한 흥부에게 대박의 찬스는 왔다. 제비가 물어다 주는 박은 비록 현실이 아닌 이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했겠지만 하루하루가 고달픈 가난한 농민들에게 신분상승과 경제적 상승의 꿈과 희망을 전해주었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9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