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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은 흙 한줌

천수만이무기 2012. 4. 21. 09:39

 

 

 

궁궐 안에 꽃을 가꾸는 정원사가 새로 왔습니다.
그가 꽃을 가꾸는 솜씨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한눈에 병든 화초를 대번 가려냈고,
늘 흙투성이인 그의 손이 스쳐 가기만 해도
시들던 꽃이 생기를 얻었습니다.

하루는 임금님이 정원에 나왔습니다.
마침 새득새득한 꽃 한 포기를 돌보느라
땀을 흘리는 정원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살아나겠느냐?"

임금님이 다가서서 물었습니다.

"새벽에 맑은 이슬이 내렸고,
지금은 따슨 햇볕이 애쓰고 있으니 소생할 것입니다."

정원사가 공손히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 말이 임금님의 귀에는 거슬렸습니다.
신하로부터 이런 투의 대답은 처음들은 탓이었습니다.

"예, 임금님 덕분입니다.
이렇게 몸소 나오셨으니 곧 되살아나고 말고요."

여태까지의 정원사들은 으레 이런 대답을 하였으니까요.
임금님은 언짢았지만, 꾹 참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 뒤 임금님이 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정원을 거닐다가 또 정원사와 마주쳤습니다.

"예쁜 나비들이 많아졌군."

"예, 향기를 풍기는 꽃이 늘어났으니까요."

"못 듣던 새 소리도 부쩍 늘었어."

"그만큼 숲이 우거졌지요."

그러자 임금님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습니다.
얼굴도 붉으락푸르락했습니다.

"내 덕분이 아니란 말이렸다.!"

"예?"

정원사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길로
임금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뒤따르던 신하들도 덩달아 눈 꼬리를 치켜 올리더니,
정원사를 향해 삿대질을해댔습니다.

"성은도 모르는 저 늙은이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잔뜩 화가 난 임금님이 명령했습니다.

"괘씸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당장 옥에 가두어라!"

포졸들이 달려와 정원사를 꽁꽁 묶었습니다.

"내 덕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나 어디 한 번 보자.
감옥에서 꽃 한 송이만 피워 내면 풀어 주겠다."

"그러시오면, 흙 한 줌만 주십시오."

정원사가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오냐, 볶은 흙을 주마. 하하하."

정원사는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꼴을 보며 신하들이 물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볶은 흙을 주는 겁니까?"

"혹시 꽃씨가 숨어 있는 흙을 주면 안 되니까."

"과연 훌륭하십니다."

신하들은 임금님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앞다투어 늘어놓았습니다.

감옥에는 높다란 곳에 조그만 창이 나 있습니다.
마치 감옥의 콧구멍 같습니다.
그 창을 통해 하루에 한 차례씩
손바닥 만한 햇살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정원사는 볶은 흙이 담긴 종지를
창틀에 올려놓고 그 햇살을 고이 받았습니다.
정원사는 가끔 물 한 모금을 남겨 그 흙에 뿌려 주었습니다.
그러기를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계속되었습니다.

일 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년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삼 년을 훌쩍 넘긴 어느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종지에 햇살을 받던 정원사는 흙 가운데 찍힌
연두색 작은 점을 발견했습니다.

갓 움튼 새싹이었습니다.
그 순간, 정원사의 눈에 맺힌
이슬방울 하나가 그 위에 떨어졌습니다.
아마 바람이 몰래 조그만 씨앗 하나를 날라다 주었나 봐요.

"아무렴,
사람이 아무리 뒤축 들고 두 팔을 쳐들며 막으려 해도
그 높이 위로 지나는 바람을 어쩔 수 없지.
두 손바닥을 깍지껴 편 넓이 이상의 빛을 가릴 수도 없고...."

혼잣말을 하는 정원사의 파리한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피어올랐습니다.
정원사는 정성껏 새싹을 가꾸었습니다.

그 무렵 임금님이 감옥 곁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무심코 감옥을 바라보던 임금님이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아니, 저건 무슨 꽃이야!"

감옥의 창틀 위에 샛노란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치 별이 반짝이는 것 같았습니다.
임금님의 머릿속에 어린 왕자 시절의 일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갈라진 돌 틈에 뿌리 내린
민들레꽃을 보고 가슴 떨렸던 기억이었습니다.
그때 왕자의 스승이었던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게 바로 생명입니다. 천하보다 귀하지요."

"생명은 누가 키우나요?"

"햇볕과 비와 바람.... 자연이지요."

임금님의 귀에 옛날의 그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습니다.
비로소 그 스승의 말이
정원사의 대답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세 해 전에 감옥에 보낸 정원사가 떠올랐습니다.
임금님은 눈을 감았습니다.
꽃 한 송이조차 오직 자기 덕에 피는 줄 알고
살았던 지난날이 부끄러웠습니다.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어서 감옥의 문을 열어라. 어서!"

난데없는 임금님의 명령에 놀란 신하들이
갈팡질팡했습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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