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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볼거리

천수만이무기 2013. 8. 1. 13:34

 

 

천수만

 

충청남도 중서부에 있는 홍성군(洪城郡)은 동쪽에 예산군, 북쪽에 서산시, 동남쪽에 청양군, 서남쪽에 보령시

가 접하고, 서쪽으로 천수만에 면한다.

금북정맥이 홍성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해 대체로 산악과 구릉으로 연결된 지대를 이룬다.

금북 정맥의 오서산(791m) 에서 발원하는 광천천은 광천읍 중앙을 관류해 천수만으로 유입하고,

용봉산(379m), 봉수산(484m)에서 발원한 금마천은 홍성읍-홍북-금마-홍동면을 거쳐 흐르면서

여러 지류를 합쳐 삽교천에 합류, 아산만으로 유입한다.

 

홍성군은 동남부와 서남부에 산지가 많으며, 그 두 지역의 한가운데를 여러 하천이 흘러 지나간다.

대부분 산악이 기복된 사이에 좁은 들판을 이루는데, 하천 유역의 면적과 충적지가 군내에서 가장

넓은 금마천 유역의 들판에서 쌀농사를 짓는다.

 

홍성군은 옛 홍주군과 결성군을 합한 군이다.

홍주는 볼래 고려의 운주로 995년(성종14)에 '도단련사'를 두고 1012년 '지주사'로 고쳤다가

홍주로 다시 고쳤다.1358년(공민왕7)에 목(牧) 으로 승격해 1368년 지주사를 두었다가, 1371년

다시 목 이 됐다.

1895년(고종32)에 군이 됐고, 1914년 결성군을 합쳐 홍성군이 됐다.

 

결성은 원래 백제의 결사현으로 신라때 결성으로 고쳐 서림군의 영현이 되고, 고려때 1018년(현종9)

운주에 이속됐다가 1172년(명종2)에 감무를 두었다.

우왕때 왜구의 침입으로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1390년(공양왕2)엔 진성을 두고 유민을

정착시켰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13) 현감을 두었다가 1895년 군으로 승격, 1914년 홍주군,결성군,보령군의

일부를 통합해 홍성군이 되었다.

1941년 홍주면이 홍성읍으로 승격하고, 1942년 광천면이 읍으로 승격됐다.

 

홍성, 광천읍과 갈산 , 결성, 구항, 금마, 서부, 은하, 장곡, 홍동, 홍북면의 2읍 9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해와 면하기 때문에 대체로 온난하나 겨울엔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많이 내려간다.

1월 평균 기온은 -3.6도, 8월의 평균기온은 26.1도 이며 평균 강수량은 1167mm이다.

 

주요농산물은 쌀, 보리, 콩 고구마 등이며 한우사육단지를 조성해 소득증대에 힘쓰고 있다.

사과, 배, 복숭아 , 포도 등의 과수재배는 홍성읍, 홍북면,   잎담배는 홍동면, 특용작물인 구기자는

장곡면에서 주로 재배한다.

수산업은 간만의 차가 심하고 바다가 얕아 발달이 미약하나 조기, 새우, 조개 등이 많이 어획된다.

해안지대에는 천일염, 양식업등이 행해지고,  광천 옹암포 독배의 새우젓은 전국으로 유명하다.

1종항인 남당항과 2종항인 궁리,어사 판교항이 있다.

 

 

*오서산

금북정맥 마루금 상에 솟은 오서산(烏棲山)은 천수만을 지나는 고깃배들의 길잡이가 되어온 산으로,

'서해의 등대'라는 애칭을 갖고있다.

까마귀와 까치가 많아 오서산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대체적으로 부드러운 산세지만, 전망 좋은 바위지대도 나타난다.

오서산 능선에서 서해를 바라보는 조망이 인상적이다.

가을엔 억새로 유명해 전국 각지에서 등산객이 모여든다. 억새는 정상 부근의 능선 2km 정도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중봉 정상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에 대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다.

중봉 아래의 안부에 억새가 가장많다

 

 

 

 

*용봉산

홍성 북쪽 홍북면에 솟은 龍鳳山(381m)은 용의 형상에 봉황의 머리를 얹어 놓은 형국이라는 바위산이다.

높이가 낮고 산세는 크지 않으나 아기자기한 능선 곳곳엔 병풍바위, 용바위, 장군바위, 송곳바위,

말등바위 등 기암괴석이 수려한 경관을 연출한다.

또 산길엔 용봉산 자연휴양림에서 마련한 정자, 대피소, 평상등이 있어 걷다가 쉬기에 아주 적합하다.

11월 초순의 단풍이 아주 좋다. 용봉사 위쪽에 고려때 조성된 마애석불(보물제355호)이 있다.

 

 

 

 

*홍주성

홍성읍내에 자리한 洪州城은 처음 지어진 시기는 자세히 알수가 없다.

고려시대 까지도 기록이 없다가 세종실록 지리지에 성둘레가 533보2척이며,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 초기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수축할때 홍주성도 축조되기

시작해 1451년(문종1)에 새로 수축해 4856척, 높이11척, 여장높이2척에 608개, 적대는 24대 가운데

6대만 쌓고, 문 4개중 하나는 옹성이 없었다.

성안에 우물 2개와 작은 개울 하나가 있었다. 해자는 파지않고 본래에 있었던 읍성보다 물려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870년(고종7) 목사 안흥필이 조양문, 경의문, 망아문과 관아건물으 지었다.

1895년 동학농민 전쟁때에 많은 동학교도가 홍주성에서 처형되기도 했고, 1905년의 을사늑약에

반대해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이세영, 채광묵, 안병찬 등이 이듬해 5월 19일 1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시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6문의 화포로 공격해 덕산으로 퇴각시키고 점령한

전투로 유명하다.

홍주성은 최장 1772m에 달했으나 810m만 현존하며 성내 관아 건물 35동에 이르렀으나  조양문,

홍주아문, 안희당, 여하정만 남아있다.

조양문은 1975년 완전 해체 복원된것으로서 팔작지붕에  다포계 건물로  정면 3칸의 문루다.

홍주목의 동현인 안희당은 22칸 목조기와집이다. 역대의 홍주 목사와 홍주 군수가 행정을 집행하던

관아 건물로 현재 군청 후정에 위치하고 있다.

안희당 뒤뜰에 위치한 여하정은 고종 33년 홍주목사 이승우가 신축했는데 목조 기와의 6각형으로 된

수상 정자다.

 

 

 

 

*용봉사

홍북면 신경리  용봉산 중턱에 자리한 龍鳳寺 는 창건에 대한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전하는

유물로 보아 백제 말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까지는 이웃한 예산 수덕사에  버금가는 큰 절이었으나 1906년 평양 조 씨가 가문에서

절을 부수고 절터에 공조참판을 지낸  '조희순'의 묘를 썼다.

이때 마을 주민들이 이전 터의 동쪽 아랫자락인  현재의 위치로 절을 옮겼다.

1980년 법당을 중수하고 1982년 대웅전을 새로 지었으며, 1998년에 산신각과 극락전을 복원해

오늘에 이른다.

보물로는 홍성 신경리마래석불(제355호)과 용봉사영산회괘불탕(제1262호)이 있다.

 

 

 

 

*홍성 신경리 마애석불

용봉산 중턱의 용봉사 위쪽 산 중턱에 있는 마애석불은  바위면을 감실형으로 움푹 파내고 돋을

새김으로 조각한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높이 4m에 이른다.

전체적으로 머리부분은  입체감이 있으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양감이 약해져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통견의 법의에 새겨진 옷주름 역시 목 밑에서는 굵직한 몇가닥의 선으로 표현됐지만  아래로 내려

가면서 가는 음각선으로 되어있다.

광배는 파낸  바위면을 이용해 희미한 음각선으로 두광과 신광이 윤각선만을 나타 내었다.

얼굴은 인상이 풍만하고 원만할뿐만 아니라 신체의 비례도 좋은 편이나 간략하면서도 도식화된

옷주름, 미숙한 조각수법 등에서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을 잘 나타나 있다.

 

 

 

 

*홍주 의사총

홍성읍 대교리의 洪州義士塚은 구한말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다.

1905년 일본과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 났는데,  홍성지방에서는

이조 참판이었던 민종식을 중심으로 1906년 의병을 모아 남포와 보령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해

병기를 탈취했으며, 3월20일 에는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포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의병 수백명이 전사하여 시체가 홍주천변과 남산 일대에

흩어져 방치되었다가 1949년에 항일 의병의 유골임이 밝혀져 이곳에 모셨다.

사당인 창의사에 900의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구백의총이라 했던것을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매년 5월30일  순국의사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성삼문 유허지

홍북면 노은리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매죽헌 성삼문(1418-1456)의 외가가 있던 곳인데

성삼문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성삼문은  세종때 집현전 학자로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했으며,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고 굳은 절개를 지켜 죽임을 당한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유성원)의 한사람이다.

1676(숙종2)에 읍사  이옥랑이  옛집 근처에 사당을 세우고 사육신을 같이 모실것을 청하자

나라에서 '녹운서원'이란 사액을 내렸다.

그후 매년  12월에 제사를 지내 오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절되자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묻고 '노은단'이라 고 하고 제사를 지냈다.

1954년 홍성 고적현장회에서는 제단을 보수하고, 해마다 음력 10월20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단소는 유허로 부터 동북50m 지점에 있고, 약 30m 거리의 마을 길가엔 유허비가 있다.

 

 

 

*홍주향교

홍성읍 대교리의 홍주향교는 고려말에 처음 세웠다고 전한다.

건물 배치는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뒤쪽에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 외에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을 비롯해 동무와 서무, 전사청, 제기고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또한 축문을 태우는 향료대, 불을 밝히는 청료대, 손을 씻는 관수대 등의 석물이 남아 있는데

이는 유교에서 예를 올릴때 사용하는 것이다.

 

 

 

 

*결성향교

결성면 읍내리 의 결성향교는 1010년(고려현종1)에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여러 차례 수리했고, 1923년에 크게 보수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건물 배치는 외삼문 없이 바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그 뒤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해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외에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제기고 ,홍살문, 내삼문등이 있다.

 

 

 

 

*조응식 가옥

장곡면 산성리의 조응식가옥(중요민속자료 제198호)은 소나무 숲이 우거진 야산이 감싸고 도는

양지쪽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입구에도 소나무 숲을 조성했고, 집앞에는 연못을 만들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어 놓았다.

건축 양식으로 볼때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솟을대문을 낸 - 자 형의 행랑채 뒤에 - 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왼쪽 끝에는 중문이 연결되어 있다

중문을 들어서서 동쪽으로 꺽어 돌아가면 ㄱ 자형의 안채가 있고, 동쪽에 안마당을 감싸며 - 자형의

광채가 자리한다.

이와는 별도의 축으로 광채 뒤편에 - 자형의 안사랑채를 배치하고 있는데, 담장을 두르고 대문을 따로

내었다. 안사랑채 왼쪽 뒤편은 안채와 통할수 있도록 터 놓았다.

안채엔 사랑방을 두었다.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전통가옥이다.

 

 

 

*만해 한용운 생가

결성면 성곡리는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던 승려이며 시인 인 만해 한용운(1879-1944)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낮은 야산을 등지고 양지쪽에 자리잡고 있는 만해 생가는 쓰러져 없어진 것을 1992년 복원했다.

앞면 3칸 옆면2칸 규모의 초가인데 양옆으로 1칸을 달아내어 광과 헛간으로 사용하고 울타리는

싸리나물로 둘렀으며 바깥에 흙벽돌로 화장실을 만들었다.

생가 좌측 뒤편에 사당과 삼문을 신축했다.

만해는 1919년 삼일운동당시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후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했고, 광복 한 해전에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님의침묵> <불교대전> 등을 남겼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됐다.

 

 

 

 

*김좌진 장군 생가

갈산면 행산리는 일제때 독립운동가인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이 살던 곳이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광이 따로 있고  밖에는 마구간이 있다.

안채는 앞면8칸, 옆면3칸의 기와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왼쪽부터 2칸 부엌이 있고, 아랫방과

윗방 각 한 칸씩 있으며, 통칸의 대청이 있다.

그 위에 방이 한칸 있고 끝으로 툇마루가 있다. 방앞으로 툇마루가 있는데  맨끝방 주위에는 툇마루를

한칸 높여  누각처럼 만들었다.

마당 한쪽에 우물이 있으며 밖에 있는 마구간은  화장실과 마구를 3칸 집에 만들었다.

장군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후 청년 학우회 등의 간부를 지냈고, 군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3년간 복역 한 후 1917년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평생을 항일전투에 몸바쳤다.1920년 10월 홍범도 장군과 연합해 청산리에서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1929년 정신, 이붕해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주석에 취임하고,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했다.

한편중국의 항일세력과 연합해 대일 항전을 준비 하던중 1930년 공산당원 박상실의 흉탄에 순절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그림이 있는 정원

광천읍 매현리에 매성봉(130.4m)일원의 2만3천여평에  조성한 매현농원은 산림청에 '그림이 있는정원'

이란 이름으로 수목원 등록을 했다.

이곳엔 각종 수목 및 화훼류 1000여종 6만여점의 식물자원이 조성되어 있다.

전시시설, 편의시설, 녹지 및 기타 시설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가족과 연인끼리 산책하기에 제격이다

이곳은 보령출신 전통공예가  임진호 씨가 몸이 불편한 아들을 위해 가꾼 수목원이다.

장남 형재씨는 사고로 목뼈를 다쳐 척수장애인이 되고 말았는데, 필사의 노력 끝에 입에 붓을 물고

그림공부에 전력해 ㅁ筆 화가가 됐다.

이곳에 형재 화백의 작품을 감상할수 있는 미술관과 우리 전통가구를 한눈에 볼수 있는 가구전시장도

마련돼 있다.

또한 장애인을 배려한 동선 설계와 그림같은 소나무 , 고급호텔 수준의 화장실 등은 다른수목원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카페테리아 메이는 간단한 식사를 할수 있다.

 

   

 

*궁리포구

광활하게 펼쳐진 천수만을 앞에 두고 있으며 갯벌 처험등을 할 수 있는 체험장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고 있다.

일몰과 일출을 동시에 바라 볼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천수만을 끼고 도는 임해관광도로의 경치가 일품으로 드라이브코스로도 괜찮다.

 

 

 

*남당항

잔잔한 바다인 천수만과 어우러진 남당항은 대하, 우럭, 새조개, 까나리,새우, 장어 등의 어획량이

풍성한 제1종 항이다.

매년 9-10월 사이에 대하 축제가, 11월엔 새조개 축제가 열려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다.

남당항 해안도로 양쪽으로는 횟집들이 무려 1KM 넘게 줄지어 있다.

해안쪽은 비닐을 덮은 간이 포장마차들이고, 육지쪽은 주차장을 갖춘 일반 횟집촌이다.

어림잡아도 포장마차는 150여개, 횟집은 80여 개가 넘는다.

남당항은 바닷물이 빠졌을 때 간단한 갯벌체험도 가능하지만, 갯벌이 매우 짙어 장화를 신지 않으면

멀리 나가기 어렵다.

천수만 너머로 안면도 로 떨어지는 남당항 일몰은 홍성팔경에 속할 정도로 아름답다.

 

 

*홍성 동문동 당간지주

홍성읍 오관리 고려 때 절집인 광경사 터에 있는 동문동 당간지주(보물제538호)는 주택가 옆 빈터

한가운데 78cm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형태는 위로 오를수록 가늘어지고 위쪽에 당간을  고정시키기위한 홈이 파여 있으며 가운데 깃대는

남아 있지 않다.

기둥의 바깥면엔 세로줄 문양이 세겨져 있고, 기둥 머리 부분은 둥글게 처리됐다.

두 지주 사이에는 낮은 臺가 놓여있는데, 중앙에 깃대를 세우던 둥근 구멍 하나가 뚫려있다.

높이가 4.8m로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는 이 당간 지주는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추정된다.

 

*용봉사 영산회괘불탕

용봉사의 영산회괘불탕(보물제1262호)은 석가가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은 숙종대왕의 아들이 일찍 죽자 거대한 불화를 그려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1690년(조선 숙종16)에 승려 화가 진간이 그렸는데 1725년(영조1)에 그림을 고쳐 그리면서 적어 놓은

글이 그림의 아랫부분에 있다.

이 그림은 본존인 석가불의 크기가 작아진 점 등에서 17-18세기의 특징을 살필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용봉사 에서는 석가탄신일에 탱화를 대웅전앞 석축 위에 걸어놓고 불사를 행한다.

 

 

*고산사

결성면 무량리 청룡산(236m) 기슭의  고산사는 신라말 도선국사가 처음 지었다고 전하는데,

현재 건물의 위치와 앞마당에 있는 석탑들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절로 짐작된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신 대광보전(보물제 399호)은 정면3칸, 측면3칸, 단층 팔작지붕의 주심포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지붕 위쪽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쳐나온 부재가 주심포 양식의 초기 수법을 띠고 있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井 자 모양의 우물천장과 천장과 서까래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을

혼합해 꾸몄다.

불단 위에는 불상이 앉은 자리를 장식하기 위해 지붕 모형의 닫집을 정교하게 만들어 놓아 법당

안의 엄숙함을 더하고 있다.

팔작 지붕에 주심포 양식을 가진 아담한 건물로 그 구성방법이 독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