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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첩/나들이

능내 다산 유적지

천수만이무기 2015. 7. 2. 17:18

 

 

능내 다산 유적지

 

다산 정약용 유적지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는 
정약용이 태어난 곳이자 현재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에 이곳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에 속했고 
‘마현’, 또는 ‘마재’라고 불리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은 실학을 집대성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조선 후기의 대학자이다.
그는 일찍부터 친척들의 영향을 받아 서학과 천주교에 눈을 떴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특별히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정조의 명을 받아 한강의 배다리를 설계하였고, 
수원 화성의 성곽을 설계하면서 거중기, 녹로, 
유형거 등의 최신식 기구를 고안하기도 했다.

정조의 신임을 받아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도 항상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신하들, 특히 노론 세력의 집중적인 견제를 여러 차례 받았다. 

그러다가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인 순조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면서부터 정약용의 시련이 시작되었다. 
정순왕후는 1759년에 불과 15세의 나이로 무려 51세나 연상인 영조의 왕비가 되었다. 

정순왕후의 집안은 노론의 중심 가문이었으며, 
정순왕후의 오라버니인 김구주는 사도세자를 탄핵하여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이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데다가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했던 벽파(僻派)의 우두머리 같은 인물이었다. 

그 까닭으로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가 병으로 죽고 말았다. 
정순왕후는 이 일을 무척 원통해 했다고 한다. 

따라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자 본격적으로 
노론, 벽파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정조와 가깝게 지냈던 신하들과 노론에 맞섰던 인물들은 차례차례 제거되었다. 
그런 인물들 중에는 특히 천주교와 서학을 가까이했던 남인들이 많았는데, 
정약용의 집안 역시 남인인 데다가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정약용 자신도 한때 천주교를 믿기도 했다.

결국 정약용은 1801년 신유박해(천주교도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사건) 때에 유배를 떠났다. 
정약용뿐만 아니라 그의 매형인 이승훈(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세례자)을 비롯하여 
정약용의 형제들이 줄줄이 참수당하거나 유배를 떠나야 했다.

처음에는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갔다가,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은 뒤에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리고 강진에서 무려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는 강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에 전념하여 실학을 집대성하였는데, 
아마도 계속 벼슬 생활을 했다면 오늘날과 같이 대학자로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강진에서의 오랜 유배 생활은 역설적으로 그가 위대한 실학자로 평가받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정약용은 18년 동안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경기도 마현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책을 쓰고 학문을 연구했다. 

흔히 ‘1표 2서’라고도 불리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비롯하여 무려 500권이 넘는 책을 남겼다.

그는 실학자 중에서도 농업을 중심으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여긴 중농학파에 속했는데, 
그의 사상은 조선 후기의 사회 현실을 근본적으로 검토하여 정치, 행정, 법률, 경제, 생산기술, 
군사제도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대대적으로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762년(영조 38년)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에서 
정약용은 나주 정씨 가문의 정재원과 해남 윤씨 가문의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정약용이 태어나기 바로 직전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굶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인 정재원은 남인이었다. 
그는 영조 때에 벼슬길에 올랐다가 노론 세력에 밀려 
고향인 이곳 마현에 머무르던 중에 정약용을 낳은 것이다.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은 본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사라진 것을 
1986년에 그대로 복원해 놓은 것이다. 

1800년에 모든 관직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정약용은 집을 짓고 이름을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지었다.

여유당에서 ‘여유’란 <도덕경>에서 따온 말로, 
‘겨울에 살얼음이 언 개울을 건너는 것처럼 신중해야 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해야 한다(猶)’는 뜻이다. 

정약용은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기 전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와 
강진에서 지낸 18년의 유배 기간을 빼고는 줄곧 이곳에 머물면서 생활했다. 

정약용이 머물렀던 곳으로 여유당 말고도 
전라남도 강진에 머물렀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유명한데, 

여기서 다산이란 다산초당이 세워져 있는 만덕산에 차나무가 많아서 붙은 별명이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에 머물며 다산을 아예 자신의 호로 삼았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다산 유적지에는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과 그의 무덤, 그리고 다산문화관과 다산기념관 등이 있다. 
맞은편에는 실학 박물관도 세워져 있어 조선 후기의 역사와 실학에 대해 공부하기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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