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 이무기
한용운 생가가 있는 결성읍성 본문
오르기 힘든 산 정상에 건물 지은 이유, 이거였구나
동학혁명 때 아버지 잃고 민족시인 된 한용운 생가가 있는 결성읍성
등록 2025.03.30 11:19수정 2025.03.30 11:19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기자말] |
서향으로 앉은 초가지붕에 살포시 내려앉은 봄볕이 길손인 양 따사로이 쉬어간다.
낮은 산자락에 감싸인 초가집 앞뒤로 굵고 기운찬 산줄기가 호위하듯 나란하다.
날카로운 비파형 동검을 닮은 형산이 동쪽에서,
백제의 칠지도 같은 청룡산은 서쪽에서 남북으로 길게 뻗었다.
초가에 서린 결은, 칼처럼 벼려진 저 산줄기에서 비롯하였을까.
생가에 만해(卍海)의 삶이 서릿발 같은 기개로 남았다.
그는 누구인가?
선사, 시인, 지사, 독립운동가….
적당한 호칭이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만해 생가< 이영천>
칼날 같은 형산과 청룡산 사이, 만해 한용운의 생가가 서쪽을 향해 앉았다.
사당과 기념비 등이 선사의 동상과 함께 생가 영역에 들어 서 있다.
가장 애송하는 시를 썼으니, 시인이란 호칭이 적당할까?
서울 성북동 그늘지고 가파른, 고단한 선사의 만년을
차분하게 지켜준 '심우장'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생가인 이곳과는 대조적인, 한여름에도 서늘한 심우장이
그의 시 '님의 침묵'에 더 잘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을 늘 품고 산다.
시커먼 먹장구름에 폭풍우 몰아치듯,
홍주를 휩쓸고 간 거친 바람은 홍진(紅塵)이었을까?
1894년 동학혁명 때 만해는 아버지를 여읜다.
그때 형도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진위를 가리긴 쉽지 않아 보인다.
16세에 서당 훈장이었으니, 천재성은 말해 무엇하랴.
3년 시묘살이에 나선다.
먼 조상이 한명회의 동생이니,
당연한 양반가 관습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번민과 고뇌의 연속이었으리라.
세속의 도리와 절대 진리 추구라는 구도자의 길 사이의 번민이었다.
더구나 암울한 나라의 현실은,
사유와 존재의 끊임없는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었다.
번뜩이는 생각에 가슴이 베여버렸을까.
갈등이 얼마나 깊었으면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에 휩싸여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질' 치고 말았을까.
결국 꾸린 가정을 뒤로 하고 출가하여 설악산 백담사에서
'만해와 용운(龍雲)'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돌려진 운명의 지침은 어디를, 무엇을 지향하게 되었을까?
바닷물 들던 금리천
결성(結城)은 사실 그리 익숙한 고장은 아니다.
만해의 태생지가 아니었다면 어디 발길이 닿기나 했을까.
가야산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펼쳐진 고을을 일컫는
내포 지역에서도, 남당항과 홍성호 찾을 일이 잦았다.

▲읍성과 형산동헌
뒤 석당산 오르는 길에서 바라 본 읍성과 멀리 형산의 모습.<이영천>
그때마다 담수호가 된 홍성호를 보면서 막혀버린 이유가 늘 궁금했다.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농지 개간도, 홍수를 막아내는 기능도 아니니 망국적 토건족의 발호인가.
수룡 포구는 섬 아닌 섬이 되었고, 이름 없는 만(灣)은
그 옛날 결성으로 드나들던 뱃길의 분주함을 그리워할 뿐이다.
고대 중국의 도읍이 황허를 따라 서에서 동으로 이동해 온 건, 무엇보다 수운의 발달에 기인한다.
마찬가지로 결성현의 시원에 관하여도 몇 가지 요소가 작동했으리 추정할 수 있다.
천수만이라는 천혜의 조운선 항로는 늘 풍요로웠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왜구의 표적이 되었고, 천수만에서 내륙으로 깊게 들어 온 바다는
홍주목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다.
따라서 이곳에 성을 쌓아 바닷길로 내륙을 노리는 왜구를 막아야만 했다.
형산과 청룡산이 좌우를 호위하고 물길은 그 가운데에서 평야를 적시며 흐른다.
도선국사 이후, 입지에 영향을 미친 풍수지리가 신금성 터에도 어떤 영향을 미쳤던 걸까.
물길을 가르는 낮은 구릉이 뻗어 내린 자리에 옛 읍성인 신금성이 앉았었다.

▲결성현(1872년_지방지도)
지도 맨 좌측이 안면도이고 위아래로 긴 바다가 천수만이다.
천수만에서 내륙 깊이 파고 든 바다 형상을 지도는 잘 표현하고 있다.
물길이 휘는 우측 상단의 작은 네모에 '고읍성'이라고 표기된 곳이 신금성이다.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1872년 지방지도에 네모로 표시된 신금성이 보인다.
지금의 원금곡마을 뒤 구릉이다.
이곳은 결성 읍성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기 전까지 오랜 기간 결성현의 중심이었다.
왜구의 본격적인 침탈 이전인 통일신라로 연원이 거슬러 올라가니,
이는 조수간만에 따라 바닷물이 만과 금리천을 따라 이곳에까지 이르렀다는 방증이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에 유리했고, 농업을 관리하기에도 편리한 위치였다.
넓은 하천은 필요에 따라 차차 매립이 이뤄졌을 터이다.
갯골과 하천이 좁아지고, 퇴적이 이뤄지면서 큰 배가 드나들기 부적절해졌다는 의미다.
이는 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농업이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에 급격히 발달했다는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읍성은 문종 때 이르러 지금의 자리에 든다.
산꼭대기 근처에 있는 건물, 이유는
석당산을 아우른 읍성은, 평지성과 산성의 절충형임을 1872년 지도에서도 볼 수 있다.
읍성의 중추 기능인 동헌(지방 관아에서 사무 처리하던 중심 건물)과 장청 등 옛 관청 몇이 남았고
객사는 초등학교로, 그 외 시설물은 어렴풋한 흔적과 터만 겨우 남겼을 뿐이다.

▲결성읍성
동문최근 복원된 결성읍성 동문. 옹성이 웅장하다.<이영천>
동문이 최근에 복원되었고, 성벽은 토지이용으로 남은 지형을 통해
겨우 짐작 가능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함에도 결성 읍성은 무척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바로 동헌이 산꼭대기 근처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왜구 때문이었다.
수룡 포구에서 시작하는 만을 통해 깊숙이 침략해 들어오는
왜구를 감시하는 최적의 장소가 석당산 정상이었다.
이곳에 서면 내륙으로 구부러져 들어 온 바닷길과 천수만,
그 너머로 안면도가 평지인 듯 포개져 보인다.
산 위의 동헌 흔적을 찾아 해발 146m의 석당산에 오른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차가웠던 겨울을 어제의 일처럼 재잘거린다.
산책하듯 완만한 경사를 오른다.
그러다가 급경사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들쭉날쭉 아기자기한 산길은,
아이들이 오르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산 위 평지를 지나니 정자 '석당정'이 반긴다.

▲산 위 동헌 터
산 위 동헌 터로 추정되는 자리의 모습.
터는 농사를 지은 흔적이 역력하다.
큰 바위 아래엔 지금도 물이 솟는 샘이 있다.<이영천>
옛 동헌은 석당정 못 미친 샘이 솟는 큰 바위 주변이었다는 게 주민의 설명이다.
그러나 동헌이 앉았던 자리라고 보기도 어렵게, 터는 후대에 농토로 이용되어 훼손되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땅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던 옛 바닷길이 잔잔하다.
인간의 삿된 욕망이 뱃길을 막았으니, 주변은 육화하여 호수 흉내를 내고 있으리라.
생물 다양성은 또 어떨까.

▲홍성호
천수만에서 뭍으로 깊이 들어 온 바다를 막아 담수호 홍성호가 생겨났다.
석당산 정상에서 물길을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감시하던 풍경 그대로다.<이영천>
여기서 멀리 떼지어 들어오는 시커먼 왜구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저들이 빼앗아갈 곡식과 물산, 목숨을 지키려면 서둘러야 한다.
백성을 피신시켜 봉화를 올리고, 홍주목에도 파발을 띄워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
유비무환이다.
준비가 잘 되어 있다면 충분한 시간이겠으나, 아니라면 낭패다.
이 모든 걸 산 위에 있는 동헌에서 준비하였다니, 참으로 특이하다.

▲결성읍성(1872년_지방지도_부분)
석당산 정상까지 띠처럼 감싼 성곽이 잘 표현되어 있다.
산 정상에 그려진 신당이 특이하다.
읍성 안의 관청 배치와 성곽, 동문이 간결하고 성 밖으로 해창 등의 시설도 보인다.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하지만 17세기 중반인 현종 때에 이르러 왜구 준동이 잦아들고 평화가 찾아드니, 그마저 불필요해졌다.
이에 동헌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백성들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들었다.
장항선과 결성
일제 강점기 사설 철도로 개설된 '장항선'은 충남 서부의 중추 교통시설이다.
그중 홍성~광천 구간이 1923년 12월 개통된다.
혹자는 항일 정서와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을 비켜서 일제가 철도와 도로를 건설했다고 주장한다.
무척 타당한 의견이긴 하나, 어디에나 해당하는 건 아니다.
홍성은 어느 곳보다 항일 정서와 저항이 거셌는데도
철길이 지나고 있으니 말이다.

▲산 정상 성벽
석당산 정상에 남아 있는, 흙과 돌로 쌓은 결성읍성 성벽.<이영천>
강제로 이식된 근대화의 산물일망정, 이는 효율과 경제성을 추구하는 교통시설의 특성에 기인한다.
결성현의 입지는 해양과 내륙이 만나는 최적의 결절부이기는 하나,
철도나 간선 도로가 지나기에는 제약이 많은 곳이다.
따라서 철도가 지나기 수월했던 광천이, 결성보다 더 발전한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결성현이 옛 명성을 되찾으려면 인물과 유적 등 비실체적인 전통과
꼿꼿한 의기, 정신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결성현과 홍주는 오랜 지배계급인 노론의 본고장이었다.
이 고장 몇 유력한 양반가의 면모가 이를 대변한다.
하지만 19세기 위급한 조선은 이들을 용인하지 않았다.
노론이지만 세도정치에서 철저히 배척당했다.
몇몇 가문 연합체제였던 세도정치는, 이들과 별개 집단이었다.
중앙정치에서 배제된 내포 양반가는 정신과 맥을 이어가려 무진 애를 쓴다.
전통을 지키려 노력했고, 성리학의 정통성을 생명처럼 여기며 지켜냈다.
격동의 시기가 닥쳐오자 그간 뿌리내려 지켜낸 가치가 빛을 발했다.
그 가장 첨예한 도구가 외세배척이었다.
모름지기 이 고장의 이런 정신과 뿌리가
뜨거운 독립운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결성향교
성 밖 북쪽으로 떨어진 언덕에 층으로 앉아 있는 결성향교.
견결한 결성현의 기개를 품고 있다.<국가유산청>
석당산을 내려와 읍성을 지나 결성향교에 다다른다.
위엄을 갖췄으되 침묵에 휩싸인 향교가 고즈넉하다.
층으로 이어진 향교에서 배곯을망정 꼿꼿한 이 고장 양반을 보는 듯하다.
모름지기 참된 보수의 가치가 이 고장에 제대로 배어들었다는 생각이다.
향교를 나서 '님의 침묵' 마지막 구절을 읊조리며 결성의 기세를 되새겨 본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천수만 > 주변 볼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남 홍성 여행 코스 (0) | 2025.02.07 |
---|---|
서해안 랜드마크로 떠오르는 명소 (0) | 2025.01.26 |
홍성&서산으로 떠난가을 제철 여행 (9) | 2024.10.18 |
홍성이 이렇게 재미있는 곳일 줄이야 (2) | 2024.01.31 |
천수만 충남 홍성 죽도, 서산 간월도, 보령 천북굴 (2) | 2023.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