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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즐겁지 않은 사연들

천수만이무기 2011. 9. 11. 09:51

 

 

 "명절만 되면 심한 두통과 소화불량에 시달리곤 합니다. 차라리 일 하는 게 나아요."

추석 연휴에 가족과 친지들을 만날 생각에 기쁜 사람도 있지만 제수음식 장만 등 가사노동에 시달린 주부들과 재수생, 구직자, 노총각·노처녀 등에게는

명절이 달갑지만은 않다.

서로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오랜만에 함께 모인 자리가 즐거워야 하지만 친척들이 무심코 던지는 한 마디 말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 취업 준비생, 재수생들…'취업은 했냐'는 질문에 가시방석

비좁은 고시원에서 책과 씨름하는 고시준비생과 재수생, 취업 재수생들은 설에 고향 갈 엄두도 못낸다. 명절 때 모인 친지들이 '취업은 했냐'는 질문에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넘게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왕모(25·여)씨는 명절만 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번에는 꼭 좋은 직장에 취직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왕씨는 쓴 소리가 듣기 싫어 고향인 부산에 가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자취방에 혼자 있어봐야 기분만 더 우울해질 것 같아 고향에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왕씨는 "졸업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직장이 없어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위축이 되곤 한다"며 "동생은 간호학과에 다녀 취업 걱정이 덜한 편인데,

장녀로서 먼저 취업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 초 원하던 대학에 합격하지 못한 대입 수험생들도 추석 연휴가 고통스럽다.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지난해 재수를 했다는 김모(19)군은 최근 치러진 모의수능고사 결과가 발표된 후 연일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이번에도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가기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박군은 "이미 좋은 대학에 합격한 또래 친척들을 보면 비교 당할까 봐 마음이 좋지 않다"며 "올해도 원하던 대학 진학이 어려울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

친척들 보기가 두렵다"고 토로했다.

◇노총각·노처녀들, "언제 결혼하냐" 죄인 취급 받는 것 같아

혼기를 놓친 노총각, 노처녀들은 이번 추석 연휴를 피하고만 싶다. 혼자 여행을 가는 등 일명 '솔로' 생활이 즐겁기만 한데 친척들이 마주치기만 하면

불쌍한 표정으로 '언제쯤 결혼할거냐'는 질문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송모(29·여)씨는 "지난 설에 어머니로부터 '올해는 결혼할 남자 데려오는 게 네 과제다'라는 말을 들었다"며 "결혼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인데 주변 어른들이 시집가라고 닥달하니 결혼할 사람을 빨리 찾아야 하나 괜히 불안해 진다"고 토로했다.

서울의 모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이모(32·여)씨는 추석 연휴 동안 소개팅을 할 예정이다.

고향에 내려가면 가족과 친척들에게 '언제 시집갈 것이냐'는 질문에 시달려야 할 것 같아서다.

은행원 이모씨(37)도 "아직까지 왜 여자 친구가 없느냐는 말을 벌써 4년째 듣고 있다"며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안하는 것도 아닌데

마치 죄인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년 2월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는 홍모(31·여)씨도 "결혼을 독촉하는 친척들 때문에 추석 연휴가 달갑지 않다"며 "교수가 되고 싶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가족과 친척 성화에 공부하는 게 마냥 편하지만 않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주부들…시댁 대신 특근 자처

명절 증후군에 시달리는 맞벌이 주부들 가운데는 추석 근무를 자청한 사람도 있다.

시댁에 내려가면 제수음식 장만 등, 가사노동에 시달려야 하는데다 '둘째 아이는 언제 가질 것이냐'는 시어머니의 강한 압박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회사원 김모(35·여)씨는 "첫째 아이가 5살인데 어머니가 아이를 하나 더 낳으라고 재촉하고 있다"며 "추석 연휴기간 특근을 자처했다"고 말했다.

마트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모(45·여)씨는 올해는 시댁에 내려가지 않을 계획이다. 시댁에서 받을 명절 명절 스트레스생각하면 마음만 착찹하기 때문이다.

그는 "명절이라 가게일이 바쁘다고 하면 어머니도 이해를 해 준다"며 "가족들의 온갖 비위를 다 맞추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결혼 2년차인 회사원 윤모(28·여)씨는 시부모가 이번 명절에도 손주 타령이다.

윤씨 부부는 아직 신혼을 즐기고 싶은 마음과 경제적으로도 아이 키울 준비가 덜 됐다는 불안감에 아이는 내 후년 쯤에나 생각하고 있다.

윤씨는 "진급도 해야 하고 돈도 더 모아야 하는데 무작정 빨리 낳으라고만 하니 답답하다"며 "가뜩이나 업무강도가 높은 회사에서 일하는데 아이까지 생기면

회사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서로 부담스러운 말은 삼가야

이처럼 주고 받는 말이 스트레스로 이어져 명절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현혜경 서울 YWCA 가정문제상담실 상담사는 "좋은 소리도 세 번 들으면 싫다고 하는데 듣기 싫은 말을 친척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오가며 한마디씩 하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며 "가족이 다 함께 모일 수 있는 자리인 한가위에 지나친 관심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이예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