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공항은 여행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곳이다.
특히 국제공항은 외국인에게 첫인상을 심어주는 장소이다.
서울 지역 최초의 국제공항은 여의도공항이었다.
해방된 뒤 미군이 사용하던 여의도공항은 1953년 국제공항으로 전용됐다.
전쟁의 상흔으로 인해 모두가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에 공항만 그럴듯하게 지을 수는 없었다.
여의도공항은 오막살이 공항이나 다름없었다.
1955년 경향신문 기사에는 "세계 어느 나라 공항의 시설에 비해
빈약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판잣집이 있는 공항"이라고 묘사됐다.
게다가 여의도 근처의 이촌동에는 인분을 모아 비료를 생산하는 공장이 세워지기도 했다.
이 무렵 여의도공항에서는 도쿄를 거쳐 미국으로 가는 노스웨스트항공,
타이베이를 경유해 홍콩으로 향하는 캐세이패시픽항공 노선이 운항됐다.
1957년 서울-홍콩 간 국제선 탑승 수속 장면.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
여의도공항의 시대는 짧았다. 계기가 부족해 야간 이착륙이 불가능하고,
활주로가 짧아 대형 비행기가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안은 김포공항이었다. 1942년 일제가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이용하기 위해 준공한
김포공항은 1958년 1월 국제공항으로 지정돼 한국의 새로운 관문으로 부상했다.
김포공항도 초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미군이 활주로, 관제탑을 점유한 상태에서
무작정 국제공항을 옮겨 제대로 된 시설이 없었다.
1960년 김포국제공항 종합청사 개관식.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
1960년에야 공항 사무소, 세관, 검역소가 들어선 종합청사가 개관했다.
하지만 서비스는 여전히 엉망이어서 직원들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응대했고,
면세점에는 시중보다 비싼 제품도 있었다. 당시 공항을 이용하는 승객은 하루 100명 남짓에 불과했다.
이후 김포공항은 40년 가까이 한국을 상징하는 공항으로 자리매김했다.
1969년에는 동남아 노선, 1972년에는 태평양 횡단 미주 노선이 취항했고,
1973년에는 보잉 747기가 등장했다.
1960년에는 국내선을 포함해 하루 6편이 운항됐으나, 1970년에는 40여 편으로 늘었다.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운항 노선과 이용객도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포공항은 아시안게임, 올림픽을 거치고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가 도입되면서 한계를 드러냈다.
1980년에 구 청사보다 2.3배 넓은 지상 4층, 지하 1층의 건물을 신축했으나 금세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1980년대 후반부터 언론에 '북새통', '탑승객 사상 최고' 등의 기사가 보도됐다.
청사는 물론 활주로도 더 이상 항공기를 받지 못할 정도로 붐볐다.
결국 정부는 1990년 영종도와 용유도 일대를 매립해 신공항을 건립하기로 확정했다.
인천국제공항 전경. 사진/인천국제공항공사 제공 |
국제공항의 세 번째 막은 2001년 3월 올랐다.
8년 4개월간의 대역사 끝에 문을 연 인천공항은 동북아시아의 허브 공항을 목표로 설계됐다.
개항 원년에 1천454만 명이었던 연간 이용객은 지난해 4천만 명을 돌파했다.
국제공항협의회(ACI)의 기준에 따라 '대형 공항'으로 거듭난 것이다.
같은 기간에 취항 항공사는 47개에서 84개로, 취항 도시는 109개에서 176개로,
환승객은 163만 명에서 706만 명으로 증가했다.
또 각종 평가기관으로부터 최고의 국제공항으로 선정될 만큼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인천공항에서는 지난해 착공한 제2여객터미널과 제2교통센터 공사가 이뤄지고 있다.
2018년에 완공되면 인천공항의 여객 처리 능력은 6천200만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