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 이무기
고부 관계란.. 본문
시어머니 한마디에 모든 걸 내려놓았지만…
결국 더 나쁜 며느리가 되었네요
세속적인 충고를 경멸할 수는 있어도, 이길 수는 없나 봅니다.
우리가 이상을 좇아 먼 길을 도는 동안 세속의 지혜는 지름길을 택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만신창이가 된 우리를 기다리지요.
십 년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니, 옛 친구의 충고가 떠오르더라는 오늘의 손님.
여러분에게도 이런 씁쓸한 경험이 있으신지요?
'시집가서 석 달만 미친 척하면 삼십 년이 편하다.'
십수 년 전, 결혼 소식을 알리려고 만난 친구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명심해. 시부모는 시부모야. 애쓸수록 너만 고달파져. 석 달만 눈 질끈 감고 미친 척하는 거다!"
겉으로는 웃었지만, 저는 그 말이 좀 거북했습니다.
내 몸 고달파지는 게 두려워 사람 같지 않은 짓을 부러 연출한다니요.
설혹 그 충고를 따라서 효과를 본 사람이 제법 많다 하더라도, 나만은 그럴 수 없다 생각했습니다.
중학생 때 엄마를 하늘나라에 먼저 보내고, 아버지 손에 자랐기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저입니다.
시부모님에 대해서도 딸처럼 사랑받고 싶다는 작은 욕심이 저는 있었던 겁니다.
결국 저는 친구의 충고를 거꾸로 실천했습니다.
삼 년만 진심으로 노력하면, 삼십 년간 화목할 수 있지 않을까?
바쁜 직장 생활 중에도 매일 전화를 드리고, 주말이면 두 분을 모시고 나들이를 가고,
없는 솜씨에 생신상도 손수 차려 손님을 초대했었습니다.
물론 저보다 더 잘하는 며느리도 많겠지만, 중요한 건 제 마음에 아까울 게 없었다는 겁니다.
고단한 줄도 몰랐고, 넘치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삼 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 저는 여전히 친구의 충고를 씁쓸하게 되새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시부모는 시부모일 뿐이라는 말, 애쓸수록 고달파진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습니다.
고부 관계는 모녀 관계와 달랐습니다. 딸이 애를 쓰면 부모는 안타까워하며 그 짐을 덜어주려 하겠지요.
하지만 며느리가 애를 쓰면 시부모님은 그 며느리의 역량을 재평가하고, 더 많은 짐을 얹어줍니다.
며느리가 도중에 등짐을 버거워하면, 시부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꾀를 피우느냐고요.
스스로의 깜냥도 잊고, 제 그릇 사이즈를 넘는 노력을 쏟아부었음에도,
저 역시 감사보다는 핀잔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 식구이기에 고마운 것도 미안한 것도 없다 하시는 분들이,
며느리를 나무라실 때는 남보다 더 서운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쩌다 흡족한 기분이 드셔도, 며느리가 아닌 아들 덕이더군요.
내 아들이 번 돈이고, 아들 잘 키운 덕을 볼 뿐이라고요.
차츰 서운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말 한마디 못 하고
참아냈던 것은 기대치에 부응하고 싶은, 타고난 미련함 때문이었을까요?
그런 미련퉁이 짓을 끝낸 건 결혼 십이 년 차의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우연히 어머님과 남편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제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애가 엄마 없이 자라 그런가, 어른 어려운 줄 모르고 말이 너무 많아.
시에미 앞에서도 웬 수다가 그렇게 긴지, 머리가 다 아프다.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저와의 대화를 어머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이들 얘기, 드라마 얘기, 어디서 들은 우스갯소리 등, 저는 그야말로 효심 차원에서 이 얘기 저 얘기,
길게 이어나간 것인데…. 그냥 싫으신 것도 아니고, 어미 없이 자라 어른 몰라본다고 흉을 보시다니요.
어머님 마음에 늘 그런 편견이 깔려 있었다 생각하니, 마음이 얼어붙더군요.
그날로 저는 모든 것을 마음에서 내려놓았습니다.
며느리의 기본 도리는 하되, 마음을 쏟아붓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우선 어머님 앞에서 입부터 닫았습니다.
이제 용건 없는 전화도 안 드리고, 아이들 얘기도 묻는 말에 대답만 했습니다. 그런데 참 희한하더군요.
대화가 줄어드니, 관계의 무게가 10분의 1로 줄어드는 겁니다.
저는 더 이상 시부모님 일로 전전긍긍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제는 부모님이 제 기색을 살피시는 겁니다.
말이 없어지니 속을 모르겠고, 속을 모르니 눈치가 보이시는 모양이었습니다.
부모님께 지청구를 듣는 일도 사라졌고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당연한 듯 며느리를 찾으실 일을, 이제는 두 분이 알아서 해결하시더군요.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몸이 너무 편했습니다.
몸이 편한 것도 이토록 중요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 참 못됐다 생각하면서도 저는 몇 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더 이상 아무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얼굴에 무표정의 가면을 쓰고 몇 년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가면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벗지 않으면 저절로 벗겨지더군요.
며칠 전, 아버님이 병원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 저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암 선고를 받으시고도 두 분이 한동안 비밀로 하셨다는 것, 어떻게든 두 분이 알아서 대처해보려고
애쓰셨다는 말씀에 얼굴이 뜨거웠습니다. 제가 며칠 간병을 거들었다는 이유로, 연신 미안하다고 하시는
어머님을 보고도 저는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면 자존감이 높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변화가 있기까지 어머님이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받으셨을까요.
어머니에게도 저는 이미 남 같은 며느리겠죠.
다시금 옛 친구의 충고를 생각해봅니다.
석 달만 미친 척하라던 친구보다 제가 더 독한 며느리 아닐까요?
내 마음의 상처를 핑계로,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냈으니 말입니다.
다 받아주다가 돌연 얼굴을 바꾸었으니 말입니다. 알고 보면 속이 허한 노인들일 뿐인데….
등짐 벗은 듯 편히 지냈던 지난 몇 년의 무게가 한꺼번에 짓누르는 기분입니다.
애초에 제가 원한 건 이런 고부 관계가 아니었는데, 먼 길을 돌고 돌아
결국 더 나쁜 며느리가 되고 만 제 마음이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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