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 이무기
아차산 관용탑 본문
관용탑
아치울 마을 끝 즈음에 다다르면 오른쪽으로
아차산의 시루봉 보루로 향하는 길이 있다.
10여분을 오르면 오른쪽 길은 시루봉 보루로 향하는 길이고,
왼쪽은 아차산 2보루로 향하게 된다.
두 길 을 다 버리고 마주선 길을 선택하면 아차산의 큰절,
큰골, 절고개로 불리던 아차산 절터3에 바로 닿는다.
제법 넓은 터에 밑변 11m, 높이 13여m의 탑이 다듬지 않은 할석으로
첨두방추형탑(尖頭方雛形塔) 으로 웅장한 기상을 자랑하며 자리하고 있다.
일종의 ‘막돌허튼층쌓기’ 방법으로 축조된 관룡탑은
주위의 땅 밑에서 파낸 할석을 다듬지 않 고 그대로 쌓아 올린 계단식이다.
이처럼 주변에서 얻은 막돌을 그냥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든
기법의 탑을 적석탑(積石塔)이라고 한다.
이러한 적석탑은 그 쌓아진 형태에 따라 누석대형(累石
臺形)과 원통형, 원추형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이들 탑의 형태는 본래 부정형적(不定形的)인 것으로 회나 시멘트, 흙 등을
돌 사이에 채우지 않 고 담이나 축대를 쌓듯이 마구잡이로 쌓아 올린
무계획적이고 무작위적인 일종의 돌무더기에서 진 일보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무작위적인 돌무더기로 부터 마침내 원통형, 원추형,
방형의 적석 식 탑모양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관룡탑 하단부 중앙에는 감실을 만들어 부처를 모셨다.
뒤로 돌아가면 작은 탑이 하나 더 있는 데, 이곳에는 산신을 모셨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불탑의 성격과 민간신앙으로의 산신을 모신 형식이 가미되었다.
개인의 원력 (願力)으로 쌓은 ‘공덕탑’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화관암 뒤편에는 커다란 바위에 직경 30㎝ 정도의
맷돌이 남아 있어 옛 절터 인 것을 확인 시켜주고 있다.
탑을 쌓은 김봉학 부부는 27년간 옛 절터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탑 쌓는 일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2007년 까지 부인이 살아 계시는 동안 계속되었다.
42년을 탑을 쌓 고 또 쌓아가며 서원을 이루어 내었다.
부부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큰골에 남겨진 웅장한 탑은
길을 가는 이들을 잡아 놓기에 충분하다.
두 부부가 세상을 등진 후 큰 아들에 의해
부부가 거처하던 장소에 화관암이라는 암자가 들어섰다.
세상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부모님의 서원을 다른 방범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42년 서원에 자신의 나머지 삶을
보태려고 하는 자식의 마음이 전달된다.
가까운 곳에 태종의 후궁이며 경녕군을 낳은 효빈 김씨의 묘가 있는데,
경녕군파의 선원족보 묘역 지도에 의하면 관용탑이 자리하고 있는
절터가 그 옛날 화관암 자리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설계도도 없이 두 분의 노력과 성심만으로 쌓은 관용탑이
오랜 기간 비바람을 이겨낸 돌탑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전하는 내용이 많다.
교육적으로 관광의 명소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큰 지역의 자원이다.
참고자료: 구리시지 상권 440쪽 / 1995년 구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