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 이무기
임득의(林得義) 장군 사당 "정충사"(홍성군 서부면 판교리) 본문
정충사(靖忠祠) 서기 1596년(조선, 선조 29년) 임진왜란과 당파싸운으로 국력이 쇠잔해지고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 왕족의 서얼 출신인 ‘이몽학’이 왕권 전복을 노리고 홍산(부여)에서 반란을 일으켜 청양, 보령, 정산, 대흥, 예산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홍주성(지금의 홍성)을 포위하였다. 수천명이나 되는 반군의 위세에 눌려, 문인출신의 홍주목사 홍가신은 성문을 닫은채 원군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함락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당시는 명나라 파견군과 화의가 진행중이던 시기였으며, 이몽학 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7년 일본이 다시 침략해온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혼란의 시기였다) 그때 한양에서 관직을 맡고 있던 임득의 장군은 마침 휴가를 맞아, 지금의 홍성군 서부면 부해정에 낙향해 칩거중인 부친을 찾아 뵈러 와 있었는데, 홍주성의 위급함을 접하고 즉시 의병 800여명을 일으킨 후 장군이 선두에 서서 긴 칼을 휘두르며 적의 포위망을 뚫고 성으로 진입하여 백성들의 동요를 막고 수비를 굳건히 하였다. 임득의 장군은 지략과 용력이 뛰어나고 음양이수에 밝아 수일내에 찬비가 내릴 것을 예측하고 성 밖의 초가집을 불화살로 쏘아 모두 태워 적들의 은신처를 미리 없앴는데, 며칠 후에 정말 비가 내리자 성문을 열고 총공격을 하니 패하여 도주하던 반란군의 시체가 들을 메웠다고 한다.
당시 이 전투를 본 백성들은 임 장군을 신이라 일컬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 싸움의 패배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반란군이 분열되고 현상금이 걸렸던 이몽학이 부하들에게 죽으면서 난이 평정되어 홍주성을 구하게 되었다. 이몽학의 반란은 처음에 기병 700여명으로 시작하였으나 삽시간에 수천명이 반란군에 합세하였다. 당시 5개 고을의 중심이었던 홍주성까지 함락되었다면 경기, 중부권까지도 위급한 지경이었다. 이 반란은 도원수 권율까지 출동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과 정유대란의 혼란에 묻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커다란 반란사건이었다. 이 승전보를 받은 임금(선조)께서는 임 장군을 “충청도 수군 우후”에 봉하셨고 이어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에 올랐으며 1604년(선조 37년)에 “청난공신” 3등에 책봉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으며 “호성 원종 공신”으로 녹훈되었다. (전전긍긍하다가 전승보고서를 올린 목사 홍가신은 1등공신으로 책봉되었다.) 1558년(조선 명종13년)에 태어나 홍주(홍성)에서 성장한 임득의(林得義) 장군은 1585년(당시 28세)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이 치열하던 1592년(선조 18년)에는 임금님이 의주로 피난가실 때 임금님을 수행하신 공으로 “호성공신”의 칭호를 받았었다. 장군은 1612년(광해 4년)에 하세하신 후 의정부 축석령에 “예장”(지금의 국장)으로 모셔졌으며 1647년(인조 25년) 증직으로 “승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훈련원사”를 받으시고, 지금의 ‘충남 홍성군 서부면 판교리 25’에 사당인 정충사(靖忠祠)를 세워 배향하고, 묘역 또한 이곳 청룡산으로 옮겨 “불조묘(불천지위:不遷之位)"로 영구히 모시도록 왕명을 내렸다. 그 후 홍성읍에 있는 월산(月山)의 “홍양 정난사”에 이어 이 산의 정상에 있는 “청난사”에는 당시 공신 책정을 받은 다섯 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장군의 전승비는 홍성읍 입구 금마천(말무덤)에 “홍양 정난비”와 비각을 세워 홍성 군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1995년에 “임득의 장군 묘역”과 사당 “정충사”가 충청남도 문화재 제 340호로 지정되었다. 정충사와 묘역은 임득의 장군 후손이 대대로 관리하며, 지금은 장군의 14대 종손이 종가를 지키고 있다. 충절의 고장이라고 불리는 홍성(洪城), 한용운 선생의 생가와 김좌진 장군의 사당도 이곳에서 2~3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임득의 장군 묘역 이정표 인근에 김좌진 장군,한용운 선생의 생가 등도 있다.
임득의 장군 사당 정충사 입구
정충사 정문
정충사
약 300여년 전에 지은 정충사 (정면 3칸, 측면 2칸의 8작지붕 주심포 양식)
정충사 안에 모신 임득의 장군의 영정
290여 년 이상된 임득의 장군영정 (진품은 충청남도 역사박물관에서 보관중으로 보물지정을 앞두고 있으며, 이곳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임득의 장군이 생전에 임금으로부터 받았던 교지들
정충사 인근에 있는 임득의 장군 묘(중앙 맨 위쪽)
묘비와 혼유석
묘의 좌우에 있는 문인석과 석주
금관조복형(金冠朝服形)의 문인석(文人石)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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