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 이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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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 야사(野史)

천수만이무기 2012. 12. 23. 10:03

 

 

 

 

 

주먹 야사(野史)

일제 식민지 설움에서 두 주먹을 밑천으로 민족긍지 를 잃지 않고 살아온 사나이 들이 해방 전후 6.25전쟁 소용돌이 속에

나라의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은 초기 무정부 상태 하에서는 법 보다는 주먹이 먼저 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때 그 시절 오직 주먹하나로 세상을 주름잡았든 시절이 있었다. 이름하여 무수한 인물이 떴다 사라져 갔지만

그중 전설의 싸움꾼 스라소니(이 성순)는 조직도 없이 홀 홀 단신이면서도 당시 주먹계의 보스인 김두한, 명동 보스인 이 화룡,

동대문 황제 이 정재 등의 대단한 조직체를 갖춘 보스들로부터 한결같이 형님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다.

 

그의 싸움기술과 생시의 일화(逸話)들은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따로이 쓰기로 하겠지만, 그가 17세 소싯적 그의 고향

신의주에서 중국 봉천을 넘나들며 일제하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기차로 밀무역을 할 때, 약간 언덕바지의 기찻길 옆에

서 있다가 기차가 지나가면서 속력이 좀 늦추어진 틈을 이용, 일본말로 “도비노리”로 기차에 올라타는 좀 위험은 하지만

밀수꾼들이 세관의 눈을 피하고, 무임승차를 할 수 있어 하는 것이지만, 이 “도비노리”는 여간 몸이 재바르지 않으면

앗차! 잘못하여 달리는 기차속력에 빨려 들어가 즉사 할 수도 있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아주 위험한 것이다.

 

달리는 기차 속도에 맞추어 달려 가다가 어느 순간에 난간을 잡고 속도를 이용 몸을 박차 튕겨 재바르게 몸을 날려 귀신처럼

기차에 올라타는 기술? 과, 무임승차 하였으니 역에서 내릴 수 없어 역 가까운 어느 적당한 지점에서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

내리는 기술이나, 기차 안에서 경찰의 검표가 있을 때는 뒤로 몰리다 마지막에 할 수 없이 기차 안에서 밖으로 뛰어 내리는

기술은 한층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일본 경찰이 빠르게 달리는 밖을 내다보면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저만치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시라소니가 여기에서 터득한 싸움 기술중 하나는 싸움도중 갑자기 등을 돌려 벽 쪽을 향해 총알같이 달려가 한두 발 벽을 타다,

반사적으로 벽을 튕기며 공중걸이로 몸을 한 바퀴 돌며 발치기와 박치기로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마리의 벌이 번개와 같이 침을 꽂고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한다.

 

여기서 그의 싸움기술을 미사여구로 칭찬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어 내 듯이, 사람은 누구나 그 시대에 걸맞게 살아가는 자를 영웅으로 부르는가? 봅니다.

 

1914년 신의주에서 출생한 시라소니는 위로 두형이 있었는데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고, 전 일본 빙상대회에서

1등을 한 형들은 부모와 이웃들의 촉망을 받았으나, 후세 사람들은 정작 싸움꾼인 시라소니는 모두들 익히 알고 있지만,

그의 형들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풍운아 김 두 한

 

 

김두한 장가 가든날

 

김두한의 첫사랑 박인애 

 

법정에선 이정재

 

사형직전의 이정재

 

 시라소니 이성순

'시라소니'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李聖淳은 우리나라 주먹 1위로 공인받고 있다.
아니, 동양 제일의 주먹으로 치는 사람도 많다. 2위부터 5위까지야 사람들에 따라서
순위가 달라지겠지만 아마 주먹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주저없이 시라소니를
첫 손에 꼽을 것이다. 신의주가 고향인 이 불세출의 주먹은 한 마디로 싸움을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신화를 이뤄낸 사나이다.
 
그의 주먹경력은 크게 세단계로 나뉠 수 있는데 13세가 되던 해 싸움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시점부터 약관 20세에 이북 최고의 주먹 박두성을 평양으로 날아가
일거에 때려 눕힌 후 이북 최고의 주먹으로 인정받기까지가 그의 싸움경력 중 초기라
할 수 있겠다.

이 당시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13세 이후부터 20살이 되기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두세번 정도 신의주와 인근지역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싸움경력이 싸움꾼의 요소 중 가장 첫손에 꼽히는걸로 봐서 그 당시 그는 이때가
수련기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 후 중국으로 날아 가 대륙을 평정하던 시절을 중기로
볼 수 있는데, 20살부터 시작 해 30살 무렵까지 말 그대로 날고 긴다는 일급주먹들만
때려 잡아 그의 성과를 높였다. 

이 당시 중국에는 이북에서 손 꼽히는 주먹들도 대거 진출했는데 시라소니 만큼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 했다. 대개 한곳에 정착 해 그 지역으로 들어오는 주먹들만
상대하며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시라소니는 대륙 전역을 떠 돌며 이름있는
주먹들을 직접 찾아 가 때려 눕혔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 시기야말로 시라소니를 이야기 할 때 그의 주먹인생 중 최고 전성기라 말 할 수
있겠다. 중기를 거쳐 고꾸라 형무소에 복역 중 일본의 주먹들도 차례로 제압 한 후
그는 월남을 하는데 당시 서울에는 다들 알다시피 이정재, 이화룡, 김두한등 소문난
주먹들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대륙에서의 무용담에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허풍까지 씌워 져 시라소니는
월남하자마자 신화적인 존재로 주먹들 사이에서 오르내린다. 그에 걸맞게 그는
월남하자마자 맨발대장과 마사이찌 고영묵을 때려눕히며 화끈한 신고식을 펼친다.
 
결국 너무나 유명한 동대문의 린치사건으로 인해 (아래 동영상 참조) 불구 직전까지
가지 만 그 후 장면박사의 요짐보(경호원)로 활동하다 주먹계에서 영원히 손을 씻었다.
 
시라소니에 대한 평가는 주먹계에서 더욱 높이 쳐 주었는데 유지광은 그의 저서에서
역대최고의 싸움꾼으로 그를 거론했으며 만화가 방학기씨는 그의 책에서 싸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사나이라고 평가했었다.

주먹꾼은 아니지만 주먹역사에서 빼 놓을수 없는 연예계의 대통령 임화수는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극장 조라치 시절 지나가다 우연히 그의 신기에 가까운 싸움실력을
본 그는 이후 출근도 하지 않은 채 매일 시라소니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고 하고
동대문파의 원로격인 김사범은 그를 가리 켜 조선의 주먹을 뛰어넘어 동양 최고의
주먹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미관의 식구들

 

사형 직전의 임화수

 

풍운아 김두한

 

황소를 때려 잡는  최배달

 

 

1960년대 이후부터는 선배에 대한 예우와 낭만파 주먹시대가 사라지고

각종 흉기로 무장하는 야비하고 살벌한 조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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