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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모음/옛날 생각

아차산성과 워커힐

천수만이무기 2009. 1. 28. 11:12

한강 광나루 북쪽 언덕에 표고 198m 높이로 우뚝 솟은 아차산 위 광진구 광장동 산16번지46호와 구의동 산1번지 2호에 걸쳐

위치한 133,700 제곱미터 규모의사적 제234호 아차산성은 산 정상에서 시작해서 동남쪽으로 한강을 향해서 완만하게 

비탈진 중턱을 따라 둘리었는데, 그둘레가 1Km에 이른다 성의 형식은 퇴뫼식으로 그 규모가 매우커서 성 안에는 작은 계곡도 있다

 

아차산성은 강건너 평고성,곧 풍납 토성과 더불어 삼국시대의 중요한 요새였다 즉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390년에 아차산성을

공격한이래 신라 진흥왕이 555년에 서울 지역을 손에 넣을때까지 1백65년간 백제 고구려 신라 세나라가 싸워 뺏고 빼앗기던

격렬한 싸움의 무대였다

 

한강 북쪽 언덕에 자리한 이곳 아차산성은 한강 남안에 자리한 풍납 토성 및 그 옆 몽촌 토성과 더불어 백제의 서울

한성(지금의 광주군)을 보위하던 보루였는데 AD 475년  백제 21대 개로왕이 성밖에서 고구려 장수왕의 원정군에 의해 

사로 잡힌 비극은 백제 쇠망의 신호이기도 했다

 

한편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이자 딸 평강공주의 부군으로 용맹을 떨치던 바보 온달 장군은 신라에게 빼았긴

죽령 이북의 땅을 회복 하고자 비장한 결심을 품고 멀리 아차산성까지 와서 싸우다가 성 아래에서 적장의 화살을 맞고

전사한 전설은 듣기만 해도 장렬하기 그지없다

 

이때 신라군은 고전 끝에 승리한 싸움이었기에 장한성가(長漢城歌)까지 지어 그 전공을 기렸는데 그 노래가

매우 슬픈 곡조 였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백제의 슬픈 역사는 이곳 아차산을 지키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었고 온달 장군의 비장한 전사는 결국

아차산성을 굳게 지켜 버틴 신라로 하여금 통일에의 기약을 굳혀준 첫 신호였다고 할수 있다

 

이렇게 옜날로는 삼국 시대의 중요한 전략 요충지로서 고구려 신라 백제가 격돌한 역사의 현장이었을 뿐 아니라 근대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 낚시터 였던 광나루가 휴양지로도 유명했었다

 

뒤로는 아름다운 아차산 봉우리가 솟아 있고 강 건너 들판 동쪽엔 검단산(黔丹山) 남쪽엔 남한산성(南韓山城)

서쪽엔 관악산(冠岳山)이 병풍처럼 펼쳐있는 중에 서남쪽이 탁 트인 배산임수 (背山臨水) 명당에 그 터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런 아차산성 남쪽 기슭아래,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이 발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자리 약 15만평의 대자연속에

워커힐이 들어 앉아있다

 

워커힐호텔의 설립배경과 이름의 유래

1963년 4월 설립된 워커힐호텔은 6.25 전쟁 당시 주한 미8군사령관으로 활약하다 50년 12월 23일 서울 북방 도봉지역 전선에서

북진작전을 지휘하던 중 숨진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을 기리기 위해 `워커힐(Walker Hill)' 즉 `워커의 언덕'으로 명명됐다.

 

호텔에 워커 장군의 이름을 붙인 것은 `전쟁영웅'을 추모한다는 뜻 외에도 주로 미군이 주축이 된 유엔군 휴가 장병 유치시설로

그 성격이 규정된 만큼 그들이 존경하는 인물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친근감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에서 비롯됐다.

 

스타우드사의 세계적 호텔체인인 쉐라톤 호텔과의 프랜차이즈계약, 독창적인 서비스 개발, 국내외 시장 개척 및 전문 인력육성 등으로

세계 수준의 호텔로 성장하는 바탕을 마련하였고 국제적 명성을 얻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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