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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호텔산업의 선구자 "워커힐"

천수만이무기 2009. 4. 17. 14:56

 

 

아차산 자락의 워커힐 전경
▲ 아차산 자락의 워커힐 전경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1년 5․16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부당한 정권찬탈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 국가적인 업적의 과시가 필요한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들이 몰아낸 장면의 제2공화국의 서랍에서 잠자던 경제개발개획을 끄집어내어 1962년부터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밀어붙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이었다. 아직 제조업도 변변치 못하던 당시에 이 거창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외화획득을 통한 국가자본의 기반을 조성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였다. 따라서 먼저 시작한 사업이 관광사업이었다. 관광사업은 일반 제조업종에 비해 절차와 과정이 간단하고 빠르다는 장점이 있었으므로 관광사업을 통해서 경제개발의 종자돈을 마련해보자는 계산이었다.

당시에 확실한 관광사업의 고객이었던 3만 명의 주한미군 유엔군 휴가장병들은 국내외 관광위락시설이 보잘 것 없음을 들어 홍콩, 일본 등지로 휴가여행을 떠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국내로 유입되어야 할 관광수입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배가 아픈 일이었다. 5․16이 있은 지 3개월만인 1961년 9월에 워커힐 건설계획은 수립되었다. 당시 군사정부의 입법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워커힐의 건설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주한 유엔군 휴가장병 및 일반 외국인 관광객에게 국제수준에 손색이 없는 숙박, 휴양 및 오락 등의 종합시설을 제공하여 관광의 산업화를 기하고 외화를 획득함으로써 국제수지개선에 기여하고 국민종합휴양센타로서 관광사업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신축호텔의 부지는 성동구 광장동 산21번지 아차산 자락으로 결정되었다. 아차산 자락의 신축부지 일대는 뛰어난 주변 산세와 한강과 강나루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탁월한 전망으로 하여 서울시내 제일의 명당으로 꼽혀왔던 곳이며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의 별장이 시설되어 있을 만큼 휴양공간으로서의 입지조건이 이미 평가받고 있었다. 호텔명은 한국전쟁 당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으로 맥아더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으며 낙동강전선을 사수하는 등 한국동란의 영웅이었던 워커(Walton H.Walker)장군의 이름을 따서 워커힐(Walker Hill)로 정해졌다. 신축될 호텔을 그의 이름을 따서 주한미군이 숭상하는 인물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얻게 될 친근감도 고려한 명명이었다.

워커힐 개관 - 루이 암스트롱 기념공연

전체적인 시설은 아차산의 산세와 주변경관이 조화를 이를 수 있도록 20만평의 부지에 26개의 시설이 분산되어 건설되었다. 메인빌딩 외에도 역삼각형 모양의 전망대, 한국민속관, 5동의 호텔, 13개의 빌라가 있었다. 국내 최고의 나이트클럽쇼를 제공하기 위해 나이트클럽에는 특별한 장치들이 설비되었다. 무대장치는 앞부분을 둥글게 하고 무대 맨 뒤에 좌우로 이동하는 슬라이딩 장치와 무대 한가운데에 상하로 올라갔다 내려가며 회전을 하는 이중무대로 가설했다. 공중에서 가수가 곤돌라를 타고 내려올 수 있도록 했고 입체음향장치, 특수조명 등이 설치되었다. 국가적인 사업이니 만큼 관련부처는 물론 군장병까지 동원되었다.

교통부 시설국은 공사발주, 내정가격선정 등 기술적인 지원을 했고, 체신부는 통신시설, 서울시는 진입로 포장 및 상수도공사, 한전을 전기시설 공사를 맡아 완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공병대에서는 장비와 인력을 지원했다. 이 사업은 박정희와 김종필이 수시로 점검을 나올 만큼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착공 11개월만인 1962년 12월 26일 워커힐 호텔은 준공되었다. 준공기념공연은 미8군에 속해있는 쇼 공급회사 유니버셜에 특별히 요청, 2개쇼단으로 공연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 날 공연에서 최초로 도입한 전자올갠(1300$)이 등장하여 아리랑 등 우리 민속노래와 재즈, 스윙, 트위스트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재일교포 신종해씨가 와서 특별찬조연주를 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개관은 1963년 4월8일에 이루어졌는데 기념으로 당시에 세계적인 재즈의 거장으로 추앙받던 루이 암스트롱의 초청공연이 있었다.

귀에 익은 암스트롱의 레퍼토리인 <성자가 오실 때> <상류사회> 등의 노래와 트럼펫의 작열음이 퍼져나오자 축하객들은 손뼉을 치며 흥겨워했다. 루이 암스트롱과 7명의 밴드, 여가수 줄 브라운 등 일행이 2주일간 하루 2회씩 공연하는데 변호사와 스탭을 포함한 14명의 개런티 6만 달러, 항공료 18266달러, 숙식비 등을 포함하여 총 83330달러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초청했다. 이 같은 대우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루이 암스트롱의 공연은 2주동안 모두 3863명이 관람했다.
                                                                『워커힐30년사』, 1993, 주식회사 워커힐, 110쪽

워커힐 하니비쇼 - 2중회전무대

상설공연 프로그램은 외국쇼와  국내 연예인의 현대 및 민속가무의 두 가지로 편성됐다. 외국쇼와 국내 연예인의 현대 및 민속을 곁들여 편성한 워커힐 하니비쇼(Honey Bee Show)가 워커힐 개관과 함께 탄생한 것이다. 스테이지쇼가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던 당시로선 퍼시픽 나이트클럽의 입체감있는 무대와 하니비쇼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스테이지쇼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워커힐쇼 관계자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늘씬한 몸매들이 연출하는 라인댄스도 국내 최초로 하니비쇼가 시도한 것이다.

하니비쇼단의 입단조건은 매우 까다로워서 우선 신체적인 조건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아름다운 용모와 춤 기능에 뛰어난다 할지라도 입단할 수 없었다. 거의 같은 키와 몸매를 우선조건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키는 162cm 이상, 학력은 고등학교 졸업 이상이며 나이는 18세에서 21세로 제한했다. 워커힐 하니비쇼는 잦은 해외공연으로 일본과 동남아에 소개되었다. 이러한 뛰어난 시설과 수준높은 공연으로 워커힐쇼는 국내 정상의 쇼무대로 군림했고 워커힐 무대를 거쳐간 유명 연예인들도 많았다. 윤복희, 김상희, 패티김, 정훈희, 조애희, 쟈니 브라더스 등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한국 최초의 현대식 호텔로서 화려한 나이트클럽쇼를 겸비한 워커힐호텔은 서울 장안의 취객들이 주머니가 두둑할 때 호기를 부리며 찾아가는 명소가 되었다.

둥근 무대가 발밑에서 기어오른다. 바로 그 앞에서 두서너 테이블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 되어 꿈쩍 안 할 수 없다. 다리통들이 쭉쭉 뻗은 것, 말같은 궁둥이에 닭털을 치뽑은 것, 머리에도 닭털, 새털로 감고 팬티만 살짝 입은 것이 모두 손을 치켜들고 한발을 꿇고 엎드리고 서고 한 자세를 만들어 치솟아 오르고 있는 거다. 지하실에서 지상으로 오르는 미녀도 이 정도로 살덩이를 노출시켜 놓으면 식상에 걸린다. 그것도 하나둘이 발가벗어야지 서른개나 발가벗고 보면 흥미고 나발이고 하기 전에 여자에 대한 공포가 생긴다. 훨씬 남자들보다 아니 나보다 완력들이 강해보인다. 한 대 맞으면 터질 것같이 팡팡하다. 그게 일제히 흔들흔들하기 시작한다. 원형무대가 빙글빙글 도는데 따라 손과 발의 흔들리는 속도가 빨라진다. 나중에는 발을, 다리를, 허벅지를 짝짝 올려 공간을 찬다. 하얀 구두가 번쩍인다...
                                                                           『서울의 밤』, 박승희, 라이온북스, 271쪽

하니비쇼

그러나 워커힐호텔은 애초의 기대만큼 경영의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그 이유로 첫째는 유엔군 장병들이 워커힐에서 휴가를 즐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언론에 의한 과장보도로 워커힐은 몸을 파는 색시들로 채워져 있다고 오해한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워커힐에서의 휴가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은 경비문제였다. 국제적 규모의 현대식 호텔이었기 때문에 방값도 술값도 비쌌고 무엇보다 같이 할 아가씨가 없었다. 반나체로 춤을 추는 화려한 쇼를 보고난 뒤에는 외로운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바, 카지노, 쇼무대, 풀장 이외에는 이렇다 할 위락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계획 당시에 구상된 한강의 뱃놀이와 낚시터, 궁술사격장, 사이클링 등 레저스포츠 시설과 부유한 외국 관광객 유치를 위한 경비행기장의 건설은 4대의혹사건이 말썽이 되면서 축소되고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셋째는 아직 한국관광이 널리 홍보되지 않았고 따라서 외국인이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워커힐을 이용한 외국인은 1965년에는 10만 명을 넘겼으나 1970년에도 겨우 12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넷째는 접근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1960년대는 강변도로도 아직 없었고 천호대로는 착수도 되지 않았다. 워커힐을 가려면 일단 도심부로 들어가서 을지로, 왕십리, 성동교, 광나루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워커힐이 준공 개관될 당시 지금 한양대학교 앞에 있는 성동교는 넓이가 5.6m밖에 안되었다. 거기서 광나루까지 가는 광나루길은 넓이가 겨우 10m이었으며 그것도 워커힐 개관에 맞추어 부랴부랴 포장될 정도였으니 교통사정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섯째는 19만평이라는 광대한 부지에 30개에 달하는 건물과 각종 시설이 흩어져있어 효율적인 관리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1963년 개관 당시 직원수가 555명이나 되었으니 그 연간 인건비만 따져봐도 엄청난 액수였다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1966년 부임한 김현옥 시장은 10대 건설사업을 시민에게 공약한다. 그 첫째가 뚝섬일대의 토지구획 정리사업이었고 둘째가 성동교에서 워커힐에 이르는 도로확장이었다. 성동교에서 워커힐에 이르는 10m에 불과한 광나루길의 넓이를 30m로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성동교를 지나 광나루에 이르는 일대 중에서 건국대, 세종대, 어린이대공원, 워커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구획정리 사업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한 김포공항에서 워커힐까지의 접근을 더욱 더 빨리 하는 방법으로 강변도로를 단계적으로 축조했다. 이런 강북지역 개발 중에서 서울의 동부 즉 왕십리, 마장동에서 광나루에 이르는 일대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오늘날 서울의 동부지역 광진구에 많은 인구가 모여 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워커힐 건설이었으니 워커힐 건설이 미친 파급효과가 얼마나 컸던가를 실감케 하는 것이었다.                                                      『서울도시계획이야기 1』, 손정목, 한울, 157-165쪽

워커힐호텔이 경영의 수익을 제대로 못 올리는 동안 1970년대가 되면서 시내중심가에 대형음악살롱과 고고클럽이 등장하면서 젊은층은 완전히 시내중심가를 활동무대로 삼고 성인들의 상당수도 워커힐에 가는 발길을 더욱 줄이게 되면서 워커힐은 나이트클럽 쇼무대의 지존이라는 지위를 상실하고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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